본문 바로가기

불교 이야기/지혜

돈오의 삶이 곧 자비방편의 삶이다

언젠가 그 유명한 백련암에 간 적이 있었다. 도량을 돌아보는데, 참으로 어색한 조형물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리나라의 선을 대표하는 곳에...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충격을 받아 바깥에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당시 두 가지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그 하나는 아이러니.
다른 것도 아닌, 선의 스승인데, 동상을 만들다니...
좋게 해석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기는 선도량이 아닌가?

부처님의 불상은 수많은 깨달음의 비유를 간직하고 있어서,
눈 밝은 사람이 보면 반드시 반짝하고 뭔가를 얻게 되는데...
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어떤 감화를 받을 수 있을까...


두번째로 느낀 것은, 알 수 없는 슬픔이라고나 할까.
이 세상의 모든 선지식이 전해주고자 하는 것은 사랑과 자비, 그리고
영원한 행복, 영원한 자유인데...
영원한 대자유를 천명한 곳에서, 사리와 동상???........  
알 수없는 슬픔과 자유를 잃은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의 일일까...


예전에 정봉 스님께서 지리산 정상까지 일주일을 아무 것도 드시지 않고, 철저히 깨어있는 의식으로 행선을 하신 적이 있으셨다. 그 때, 사람들이 백련암에 큰 도인 스님이 계신다고 해서, 지리산에서 내려와 바로 그곳으로 가셨다고 한다.

큰 신심과 기대를 가지고 백련암에 올라갔는데, 암자 입구에 있는 큰 소나무에 "침묵하시오."라는 팻말을 대못으로 박아놓은 것을 보고 실망을 하셨다고 한다.

또 몸이 불편하신 할머니 한 분이 그때 스님과 함께 힘겹게 백련암까지 올라갔는데, 3천배를 마저 채우지 못해, 친견도 못하고 그냥 내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스님께서는 "내가 만약 도인이 된다면, 이 도량의 어른은 닮지 않겠다."고 다짐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친견조차 하지 않고 백련암 앞에서 밤새도록 좌선을 하고 아침에 돌아와, 그곳으로 편지 한 통을 다음과 같이 보냈다고 하신다.

"부처님의 대자대비한 수행처에서,

나무에 대못을 박는 것은 깨어있는 수행자로서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침묵이라는 것은, 절대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내면에서 탐진치 삼독이 쉬어졌을 때, 스스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중에 스님께서 해인사 백련암에 가보니, 그 팻말과 대못은 더이상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성철스님이 불을 지펴, 아직도 논쟁이 끊이지 않는 돈오돈수와 돈오점수...
한국 불교가 바른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이 논쟁이 확연히 정리되지 않은 탓도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비록 성철스님께서 규봉종밀과 보조국사를 폄하하고, 돈오돈수를 주장하셨다 해도...

성철스님 역시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이미, 소위 돈오라고 하는 것과는 어긋나 버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돈'이라는 것은 깨달음이라는 '오'자를 붙일 수도, 수행이라는 '수'자를 붙일 수 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래 깨달아 있는데, 어떻게 수행이라는 이름을 덧붙이겠는가?

수행자의 입장에서, 돈오돈수이니 돈오점수이니 싸울 이유가 하나도 없다. 다만, 바로  그 자리에 계합되는 돈오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내가 깨달았거나 또는 못 깨달았거나 간에, 깨달음이란 본래 갖추어져 있기에, 이 사바세계에서 펼쳐지는 모든 수행은 '일체중생을 위한 자비행' 즉 자비 방편일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즉 깨달은 사람이거나 깨닫지 못한 사람이거나 그 삶은 원력의 보살행 뿐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연기법에 대한 바른 이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돈오는 대중적으로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할 필요가 없다. 지금까지 깨달음을 얻었던 수많은 선지식들은 늘 방편을 이야기 해왔다. 단지, 근기되는 사람들이 보고 알아차릴 수 있도록, 몇 번만 본체적인 입장에서 언급을 하셨던 것이다. 우리나라 불자치고, 돈오를 몰라서 수행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을 좀 더 솔직히 들여다 보자. 돈오돈수, 돈오점수의 논쟁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가만히 잘 되짚어 보면, 우리는 얻은 것 보다 잃은 것이 더 많다.
오히려 근기가 성숙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돈오는,  어린아이 손에 쥐어진 칼과 같이 자신을 헤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선을 안다고 자부하는 일부 스님들은 고기와 술을 먹으면서,
"깨달음에 어디 청정하고 더러운 것이 있나? 청정한데 빠져있어서 어찌 깨달음을 얻겠냐"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돈오를 말한다.

또한 일부 시민선방에 나가보면, 최상승의 선을 한다는 자부심에, 삼보에 대한 귀의심마저 없는 거만한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예로 부터, 크게 깨친 위대한 선지식들은 여러 가르침을 법답게 '회통'하셨다.

우리가 정말,

생사를 요달하고 대자유인이 되어, 일체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정말로 세심하게 살펴, 바른 견해를 갖추어야 한다.

맹목적인  권위에 눈이 멀어,
제대로 사유하지도 않고, 마냥 그럴 것이라고 믿는 것은 참 위험하다.

우리가 얻는 깨달음이 비록 부처님의 구경지와 한치의 오차도 없는 동등한 것이라고 해서, 나의 미천한 방편이 부처님의 위대한 방편지와 동등하다고 여겨서는 안된다.

예로 부터, 보살행을 말한 것은 우리가 비록 본성품 자리에서는 부처님과 동등하다고 할지라도, 많은 중생을 위해 무량한 방편지를 구족해 나가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49년(45년) 간 설법하시면서, 다만 돈오만을 말씀하시지 않고 방편을 설하신 것은, 오로지 중생의 근기따라 제도하시기 위함이었다.  

이 근본 뜻에 입각해서, 돈오돈수, 돈오점수 따지고 싸우는 일 없이, 모든 가르침을 회통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육조단경을 읽을 때도, 육조단경 안의 참 뜻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고 점수를 비방하는 속인의 마음으로 신수의 가르침을 폄하한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 될 것이다. 정말로 안목을 갖춘 사람은, 육조단경을 보면서, 혜능과 신수의 게송을 회통하여 신수를 폄하하지 않을 것이다. 해인사 강원에서는 성철스님의 영향력으로 규봉종밀의 가르침을 배우지 않고 육조단경을 대신해서 배운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규봉스님의 가르침은 회통사상이고, 육조단경은 근기가 되지 않는 사람이 보면, 당파싸움밖에 되지 않을 위험을 안고 있는 책이다.

그러고 보면, 티벳불교와 우리 한국불교는 참 상반된 점이 많다. 반야지를 강조하고 스스로의 깨달음을 우선시 하는 한국불교...자비방편을 강조하고 보살행을 우선시 하는 티벳불교...

티벳불교를 접해보면서 느낀 점은, 우리나라에는 티벳보다 실질적인 공부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불자들이 참선을 하려 하고,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가?

이 훌륭한 "선"이라는 전통 위에, 계율과 참회, 원력과 자비행이 구족된다면...
한국 불교의 미래는 참으로 밝을 것이며,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당당할 것이라 생각된다.

현재 우리나라 불교를 가르치고 있는 선지식분들은, 이제 돈오에 대한 주장은 그만 하고, 오로지 수행자들이 돈오할 수 있도록, 계정혜 삼학을 갖추어 원력의 보살행을 실천할 수 있는 가르침만 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큰스님이라는 그늘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이 시대에 필요한 가르침이 무엇인지 자각하고,
오직 자등명, 법등명해야 한다.
부처가 오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가 오면 조사를 죽이라고 했는데,
하물며 내면에 있는 큰스님이라는 동상을 없애지 못한다면...
영원한 자유를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진정한 돈오, 진정한 선은 만나지 못할 것이다.
                               (보리심의 새싹.borisi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