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절에 가면 대부분의 행자방에는
큰 글씨로 '하심'이라고 붙어있다.
하심이란 마음을 낮추라는 것이다.
세속의 때를 벗고 부처님의 마음과 닮아가기 위해,
아상을 꺾고 자신을 낮추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요즘에는 '하심'이라는 이 두 글자에
'하시오'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한다.
'하심하라'...어찌보면 말이 되는 것도 같지만,
사실 하심은 '하는 것'이 아니라 '되어지는 것'이다.
티벳에서는 큰 스님들끼리 만나서 인사하실 때,
마치 경쟁이라고 하는 듯이
한없이 몸을 낮추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진정한 하심이란
행자들의 덕목이 아니라, 큰 스님들의 덕목이다.
한없이 자애롭고 아상의 흔적을 볼 수 없는
큰 스님들의 마음이
바로 '하심'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심이 저절로 되어지는 마음은
'무아의 성품'을 체득한 사람들에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상'이라는 것은
무조건적으로 꺾거나 척파해야 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세상만사도 그러하듯이,
모든 존재는 최고의 '상'으로 자신을 꽃피운다.
그리고 나서
벼가 익으면 저절로 고개를 숙이듯이,
자신의 상을 최고로 꽃피워본 존재만이
저절로 자신을 낮출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절집에 갓 들어온 행자들에게나
사미, 사미니스님들에게
'하심'은 강요되어져서는 안된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
즉 부처의 상을 꽃피울 수 있도록
'자신이 부처라는 자만아닌 자만'을 심어 줄 필요가 있다.
강요되어지는 하심은 마음 속에 부작용을 초래한다.
강요되는 하심은 거짓된 하심을 낳게 되고,
이러한 거짓된 기간이 지나
큰 스님이 될수록,
'겸손과 이해'의 미덕이 사라지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큰 글씨로 '하심'이라고 붙어있다.
하심이란 마음을 낮추라는 것이다.
세속의 때를 벗고 부처님의 마음과 닮아가기 위해,
아상을 꺾고 자신을 낮추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요즘에는 '하심'이라는 이 두 글자에
'하시오'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한다.
'하심하라'...어찌보면 말이 되는 것도 같지만,
사실 하심은 '하는 것'이 아니라 '되어지는 것'이다.
티벳에서는 큰 스님들끼리 만나서 인사하실 때,
마치 경쟁이라고 하는 듯이
한없이 몸을 낮추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진정한 하심이란
행자들의 덕목이 아니라, 큰 스님들의 덕목이다.
한없이 자애롭고 아상의 흔적을 볼 수 없는
큰 스님들의 마음이
바로 '하심'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심이 저절로 되어지는 마음은
'무아의 성품'을 체득한 사람들에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상'이라는 것은
무조건적으로 꺾거나 척파해야 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세상만사도 그러하듯이,
모든 존재는 최고의 '상'으로 자신을 꽃피운다.
그리고 나서
벼가 익으면 저절로 고개를 숙이듯이,
자신의 상을 최고로 꽃피워본 존재만이
저절로 자신을 낮출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절집에 갓 들어온 행자들에게나
사미, 사미니스님들에게
'하심'은 강요되어져서는 안된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
즉 부처의 상을 꽃피울 수 있도록
'자신이 부처라는 자만아닌 자만'을 심어 줄 필요가 있다.
강요되어지는 하심은 마음 속에 부작용을 초래한다.
강요되는 하심은 거짓된 하심을 낳게 되고,
이러한 거짓된 기간이 지나
큰 스님이 될수록,
'겸손과 이해'의 미덕이 사라지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