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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동굴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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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 수행하셨던 동굴 입구의 모습>


정봉 무무 스님께서 지리산 동굴에 들어가신 것은 94년도였다.

태백산에서 3년을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능엄경 한 권만 바랑에 넣어 지리산 화개골로 들어오신 것이다.
아무 연고도 없는 화개골짜기에 들어서서,
마을 사람에게 수행할 만한 동굴이 있냐고 물어보니,
누군가가 일러주어서 여기 맥전마을 까지 왔다고 하신다.

마을 어귀에 도착하셨을 때는 해가 어둑어둑 저물어가고 있었는데, 마을 입구에 있던 사람에게 동굴이 어디냐고 물어보니, 산중턱을 가르키며 저기쯤이라고 해서, 그  말에 곧장 산으로 올라가서 동굴을 바로 찾으셨다고 한다.

예전에 스님과 함께 그 동굴을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사실 그곳을 한 번만에 찾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말이 좋아 동굴이지...훵하게 뚤려 있는 바위틈이었다.
비가 오면 비가 새고, 여름이면 모기들과 벌레들이 달려들고, 겨울이면 칼바람이 불어 살이 애이는 곳.

여기서 3년을 수행하셨다니...

그래도 스님께서는 진정으로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인 능엄경에만 의지하여 지극하게 공부를 지어나갈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하셨다고 한다. 첫 1년 동안에는 미숫가루만 드셨는데, 모든 일들이 순리대로 뜻대로 되어 갔다고 하신다. 그 때 스님을 뵙던 현현스님은 잘 씻지도 않은 스님 몸에는 냄새가 나기는 커녕 얼굴에선 빛이 났었다고 말한다.

스님께서는 왜 동굴로 들어가신 것일까?
언젠가 그 이유를 여쭈어 보니, 더 이상 바깥의 선지식에 의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출가하시고 나서, 여러 곳의 선지식을 찾아서 오래동안 행자생활을 하였는데, 그 중에 한 분이  해운정사 어른스님이었다.
그곳에서  3년 동안 지극정성으로 시봉하며 공부를 하였는데, 참선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으나, 뭔가 아쉬움이 있어 결국은 그곳을 떠나셨다고 한다.
그 어른스님께서는 비록 마음의 근본자리에 대해서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법을 가지고 선자들을 잘 제접하셨으나, 제자들을 근기따라 잘 끌어올리는 방편에 있어서는 스님의 마음을 채우지 못했다고 한다. (뒷날 이 부분에 대해서 스님이 직접  현현스님과 나를 데리고 어른스님을 찾아가서 확인시켜주신 바가 있으셨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고 싶다.)

해운정사 다음으로 3년 동안 스님께서 수행했던 곳은 태백산에 있는 법화도량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태백산 도인이라고 전국에 소문이 자자했었다고 한다.
태백산의 선지식은 신통력이 있어 방편적인 측면에서는 참으로 뛰어나신 분이셨다고 한다. 그러나 계율과 정견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분명하지 않아, 결국엔 많은 사람들을 미혹되게 하는 면이 많았다고 한다.
태백산에서의 수행은 뼈를 깎는 일이었다고 하신다. 그 추운 겨울을 밤 12시 부터 4시까지 바깥에서 꼼짝앉고 참선하시면서 간절하게 공부하셨지만, 선지식에 대한 스님의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이름있는 선지식을 각각 3년씩 모시고 나선, 더 이상 의지하고 싶은 선지식을 찾지 못해,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을 선지식으로 삼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해서 간절하게 수행하고 싶으셨기에...택하게 된 곳이 바로 이 지리산 이었다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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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세생생 원력수생>

3년 동안의 동굴수행을 마치고 회향하는 날...

스님께서는 과거에 크나 큰 원력을 세운 것과 같이, 세세생생 오로지 중생을 위하고 부처님 은혜 갚는 일만 하시겠다고 재차 서원을 세우셨다.(그리고 10 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 서원에서 물러선 일이 없다고 하신다.)

그리고 그 첫 장엄으로 자그만한 복조리를 준비하여, 여기 화개골의 저 안쪽 마을부터 끝마을까지, 이른 새벽에 불켜진 집마다 하나씩 던져주셨다고 한다. 쌀에서 돌을 골라내듯이, 모든 사람이 삼독의 돌을 골라내고 쌀처럼 모든 이에게 이익이 되는 자비심을 가꾸어 가기를 바라셨다고 한다.

두 번째 장엄으로, 능엄경을 불사하여 인연따라 돌리셨다고 한다. 스님께서는 능엄경을 지극하게 보시고는, 수행자는 능엄경의 가르침 대로 실천수행해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다.(이 공덕으로 뒷날 내 동생이 출가하였을 때, 스님께서 능엄이라는 법명을 지어주셨다.)

세 번째 장엄으로는, 손수 등을 만들어 이웃마을 집집마다 등불을 밝혀주시고, 쌍계사에서 칠불사쪽으로 올라오는 대로에 대형 연등을 달아, 이 등불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 정법에 들어와서 깨달음을 얻어지기를 발원하셨다고 한다.

동굴에서 세우신 스님의 원력처럼, 부처님 공부를 하는 모든 수행처가 "반야의 지혜와 자비의 방편"을 갖춘 터전이 되어, 장애없이 불도를 이루기를 바래본다.

(스님께서는 이 지면을 통해, 묵묵히 동굴 수행에 도움을 준 한 분의 스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어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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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토굴앞에 하늘 향해 활짝 핀 나리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