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이야기 /2016년 | Posted by 보리심의 승가 홍서원 보리심의 새싹 2016.11.28 05:40

여성도 남성도 아닌 불성에 의지하라.

 

          타이페이 외곽에 있는 상침스님의 법당모습, 다함께 스님의 법문에 경청하고 있다

 

 

대만에서 법회를 하는 동안에, 상침스님께서도 스님께 공양과 법문을 청하셨다.

상침스님 신도분들은 상침스님을 위해 작은 법당을 마련해드리고,

그곳에서 상침스님께 서예를 배우면서 함께 수행한다고 했다.

작지만 단아하고 정갈한 법당으로 한국에서 오신 스님을 초청한 상침스님과 신도분들...

너무나도 세심하게 모든 것을 준비하고 배려한 간절한 그 마음이,

그 날 법회의 모든 일정에서 새록새록 느껴졌다.

간단하게 환영식과 차공양을 한 뒤, 상침스님은 모든 분들이 준비한 공양물들을 하나하나 보여주셨다.

우유, 계란을 빼고 직접 구운 빵들과 노보살님이 새벽부터 일어나서 만든 찐빵과 만두,

한국 스님들이 대만 음식에 적응 못할까봐 구입하신 매운 양념에,

유기농 가게 주인 보살님이 공양 올린 호박죽까지...

 

노보살님의 흑임자 진빵 맛에 빠진 00스님

 

          

 

 

2014년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상침스님과 신도분들의 순수하고 간절한 마음은,

2년이 지난 올해에도 변함없이 우리들의 마음을 잔잔한 감동으로 적셔주었다.

정성스럽게 준비한 점심공양을 다 함께 나눈 뒤에,

미리 준비한 질문을 하나 하나 드리자, 스님께서는 간절하게 법문을 해주셨다.

제일 처음 질문은 수행에 차제에 관한 질문이었다.

"수행을 할 때, 어떤 차제에 따라 수행해야 합니까?"

 

"차제는 경전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만 본래 깨달음의 상태에는 차제가 없습니다.

다만 중생의 근기따라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 차제를 만드셨습니다.

수행자가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차제를 해야합니다.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면 차제는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차제로는 소승, 대승, 최상승의 방법이 있습니다.

현재 자기 위치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채식을 못하는 사람은 채식을 하는데에서 출발해야 하고,

계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계를 지키는 데에서 출발해야하고,

공성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사람은 거기에서 부터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출발을 해야하고,

공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을 살피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먼저 공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가장 필요합니다.

 

아까 상침스님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반드시 지혜를 먼저 얻어야 합니다. 그 지혜의 보고가 바로 반야심경과 금강경입니다."

 

 

 

하나하나 이어지는 질문마다 모두 소중한 보물을 얻어가듯, 스님의 말씀을 간절하게 받아지녔다.

여러 질문 중에 젊은 처사님 한 명이 이런 질문을 드렸다.

 

"제가 누군가를 도와주려 할 때, 그 사람들이 제 말을 안들으면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도울 때 분노를 폭발시키지 않으면서 도와주는 방법은 없을까요?"

 

스님께서는 이렇게 법문을 해주셨다.

"안 도와주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예요. 상대편이 싫어하는 것을 하면 안돼요.

 세상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오히려 상대방을 방해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진리의 가르침으로 이끄는 길만이 진정으로 도와주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생사를 요달하는 가르침이고,

세상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죽음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꿈과 같은 것을 아는 순간,그 자체가 남을 도와주게 됩니다.

공의 성품 속에, 광대무변한 하늘은 어떤 도움도 바라지 않습니다.

남 도와주는 것은 신경쓰지 말고 스스로 광대무변한 하늘이 되세요.

당신은 위대한 존재입니다.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그런 존재입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먼저 이해하세요.

모든 생명은 스스로 자유롭게 발현되야할 존재입니다.

모든 존재는 있는 그대로 존귀한 존재입니다.

내가 행복한지 다른 사람이 행복한지 어떻게 판단할 것입니까?

그 누구도 강요에 의해 행복을 차지할 수 없습니다.

행복은 스스로 찾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비가 쏟아지는데 쓰레기를 줍고 있다고, 그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지 마세요.

불쌍하다고 보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미래의 위대한 붓다가 되니까요. 이 시간은 잠깐이면 지나갑니다.

지금 이 순간의 고통과 슬픔은 곧 사라집니다.

지금 이 순간의 고통과 슬픔은 미래의 붓다의 씨앗입니다.

내가 현재 넉넉하고, 행복하다고, 현재 불행한 사람에게 자만심이나 아만심을 가지면 안됩니다.

보리심을 발해서 무상정등정각의 깨달음의 자리에 누가 먼저 도달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의 깨달음을 방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만, 아치, 아견, 아애입니다.

내가 빨리 성불하려면 반드시 모든 존재를 붓다로 봐야합니다."

 

처사님의 두 번째 질문이 이어졌다.

"불교에서 동성끼리 가족을 이루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상침스님 신도분 중에는 여성 동성 커플이 있었는데,

한국과는 사뭇 다르게, 그 분들은 가족같은 분위기에서 다 함께 어울려 수행하고 있었다.

스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법문을 해주졌다.

 

"모든 존재가 남자는 여성을 가지고 있고, 여자는 남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드러난 모습이 남자면, 드러나지 않은 모습이 여자입니다.

불교적인 입장에서는 독신생활을 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엄마와 아빠의 합일에 의해 태어납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은 남자와 여자가 합일된 것입니다. 다만 남자라면 여자가 감추어진 것입니다.

나의 절반은 아빠의 것, 나의 절반은 엄마의 것. 나는 이미 완전한 존재, 완전한 합일체입니다.

여성과 남성이 완전히 내 한 몸에 합일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살펴보지 못하니까 남자는 끊임없이 바깥의 여자를 찾아다니고,

여자는 끝도없이 바깥의 남자를 찾으러 다닙니다. 우리 자신 안에서 찾으면 되는데...

끝도 없이 헤매다가, 어떤 사람을 만나 내가 찾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아보지만,

살아보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 자신을 살펴보면, 자기 내면에 이미 완전한 반려자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교적인 입장에서 이성이나 동성이나 똑같은 부분입니다.

누구나 좋아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살피지 않고 남을 좋아하는 것은 허물이 됩니다.

자기가 완전한 존재인 것을 알면 끄달리지 않습니다.

남을 좋아하는 것이 애착이나 집착이면 안됩니다.

같은 성을 좋아하는 것이 허물이 아니고, 상대방을 집착하는 것이 허물입니다.

같은 성이든 다른 성이든 남을 좋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동성애자를 똑같이 인격적으로 대해줘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찾을 때까지 우리는 서로를 도와줘야합니다.

만일 동성애자를 미워하고 허물을 찾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혼을 해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똑같이 자기 자신을 찾지 못하는 허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대오온의 몸뚱아리를 갖고 있는 물질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때까지 끊임없이 남자는 여자, 여자는 남자를 찾아다닙니다.

이 성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려면 우리는 불성에 의지해야 합니다.

남성, 여성, 중성도 아닌 불성에 의지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을 좋아한다면 그 사람의 성품이 자기 안에 있습니다. 반드시 언젠가 찾을 수 있습니다.

거룩하고 위대하신 자신의 성품에 의지하세요.

자기 자신을 찾는다면, 바깥의 어떤 존재도 자기 자신의 성품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찾지 못한다면, 헤매게 됩니다.

위대한 붓다의 성품은 본래부터 갖춰져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이러한 법문 끝에, '이 처사님이 내면의 불성을 찾을 수 있도록' 법회에 참석한 모든 분들이

다 함께 격려의 박수를 쳐주자고 제안하셨다.

젊은 처사님은 사실, 출가를 발원하고 있었는데,

그날 스님과 신도분들의 격려에 감격해서 결국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