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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몸 겨우 누일 한뼘 공간도 감사하지요.(문화일보)

처자식도… 재물도… 求道의 길 못막아

지리산 토굴 스님들 수행이야기가 책으로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m


토굴은 폐품으로 만든 한평짜리지만 젊은 비구니 스님들에겐 가장 소중한 수행공간이다.


왼쪽부터 정봉 스님, 현현 스님, 천진 스님. 정봉 스님과 현현 스님은 속가의 부녀지간이자 불가의 사제지간 이다.

“모기, 파리, 개미 한마리라도 죽이지 말 것. 시계없이 새벽 2시 반에 일어날 것, 새벽 예불에서 모든 수행을 다해 마칠 것. 부처님의 바른 법과 중생들을 향한 대원력의 마음 외에는 세속적인 마음을 내지 말 것….”

경남 하동군 운수리 맥전마을에서 토굴을 얽어놓고, 봄, 여름, 가을, 겨울없이 안거하며 수행하는 스님들이 있다. 정봉(56) 스님과 정봉 스님의 제자로 찾아든 비구니 천진(34)·현현(32) 스님.

기와지붕의 법당 대신 헌나무와 문짝, 그리고 플라스틱으로 손수 지은 인법당 주변엔 새벽 2시40분이면 어김없이 스님의 도량석 소리가 울려퍼진다.


지난 5일 전화를 통해 처음 만난 정봉 스님은 “여보세요” 대신 “예~부처님”하며 기자를 반겼다.

정봉 스님이 맥전마을을 찾아든 것은 1994년 저녁. 마을 뒤 산중턱의 동굴에서 홀로 3년간 수행한 것이 첫 인연이었다. 당시 그는 정식 출가를 하지 않은 속인 신분이었으나 이미 수행 이력은 길었다. 1986년 해인사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해 상주 남장사 등지를 떠돌다 해운정사 조실 진제 스님을 부목겸 행자로 시봉하며 3년을 살았다. 해인사로 가기 전 스님의 행적도 범상치 않다. 경남 함양의 부유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스님은 중학교를 마친 뒤 진학 대신 동네 이발소로 향했다. 이생에서 세상 일을 빨리 해 마쳐야겠다(깨달음을 얻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발소에서 시작한 세상일 배우기는 양복점, 신발공장, 가방공장, 비옷공장, 장미농장, 보험회사, 버스운전, 택시운전, 트럭운전 등으로 이어진다. 세월이 흘러 군대도 다녀왔고 결혼해서 아이도 낳았다. 지금 그와 함께 수행중인 현현 스님은 그의 딸이다. 하지만 그는 틈만 나면 가부좌를 틀며 화두를 놓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는 눈이 환해지는 것을 느낀다.

모든 것을 훌훌 털고 해인사를 찾아든 계기다. 이후 스님은 절에서 물 기르고, 장작 패며, 밥하고 청소하는 절일을 도맡는 행자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절에만 묶어놓지 않았다. 속가 옛 아내의 병이 깊어 병원에서도 이미 살릴 수 없다며 집으로 돌려보냈다는 것. 스님이 부산에서 다시 버스운전을 시작한 것은 순전히 옛 아내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가장 가까운 인연도 마다하면 장차 누구를 제도하겠느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세상살이는 출가생활과 다르지 않았다. 식당의 김치도 물에 씻어 먹을 정도로 고기는 물론 오신채도 철저히 금했고, 틈날 때마다 화두를 들었다.

옛 아내가 기적적으로 병이 낫고 막내가 고교를 졸업하자 그는 다시 태백산으로 수행을 떠난다. 그가 지리산 동굴로 찾아든 것은 태백산에서의 3년 수행을 마친 뒤였다. 말이 동굴이지 비가 새고, 황소바람이 넘나드는 바위틈. 그곳에서 그는 비바람과 추위, 그리고 달려드는 모기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며 다시 3년을 정진한다.

동굴 수행을 마치고 회향하던 날 그는 ‘세세생생 오로지 (파리와 모기까지 포함한) 중생을 위하면서 부처님 은혜갚는 일만 하겠다’고 재차 서원한다. ‘삼보’의 하나인 승(僧)의 제대로 된 전범을 몸으로 보이겠다며 송광사와 쌍계사 강원 등을 마친 뒤 정식 비구계를 받은 것은 나이 50이 지나서였다.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m

기사 게재 일자 2009-06-08
 

몸 겨우 누일 한뼘 공간도 감사하지요 제자 천진·현현스님 “모기 한마리도 부처님 대하듯”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m

천진·현현 스님이 정봉 스님을 찾아 맥전마을 홍서원에 정착한 것은 2002년 봄이었다. 두 젊은 비구니 스님은 지난 2000년 한달 사이로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며 수덕사 견성암에 출가한 도반. 고려대 문과대를 졸업하고, 다시 홍익대 미대에서 공부하던 천진 스님은 대흥사에서 짧은 참선수행을 계기로, 시민선방에서 수행을 배우다 아예 출가 수행자의 길로 나섰다.

부산대 음대를 졸업한 뒤 아이들을 가르치던 현현 스님은 어릴 때부터 늘 수행중인 아버지를 보며 이미 수행자의 삶에 익숙한 터였다. 그러던 차 어느날 ‘지금 발을 빼지 않으면 영원히 세상에 붙잡힐 것 같은 어두운 예감'에 대자유의 길을 찾아 떠난다
두 젊은 비구니 스님이 찾아들면서 홍서원에도 적잖은 변화가 생겼다. 폐품으로 얽어맨 인법당 하나만 있던 곳에 토굴 두 채가 더 들어선 것. 정봉 스님이 두 제자를 위해 한 사람이 겨우 발뻗고 누울 수 있을 정도의 작고 허름한 집을 두 채 지은 것이다.


새벽 도량석 및 예불과 함께 시작되는 이들의 일과는 아침법문, 자율정진, 108대참회기도, 점심공양, 자율정진, 108대참회기도, 휴식, 저녁공양, 저녁법문, 자율정진 등 일과로 끝없이 반복된다. 모기, 파리, 개미 한마리도 죽이지 않음은 물론이고, 달려드는 모기를 애써 피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 인연으로 성불하라며 기쁜 마음으로 모기에게 피를 빨리고, 개미와 벌레, 쥐, 들고양이에게도 음식을 나눠준다.

지난해 여름 어느 불자가 수행관을 지어 보시했으나 이들이 머무는 곳은 여전히 작은 토굴이다. 건물짓는 불사보다 마음의 불사가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에서다. 이런 생활을 좇아 모여든 스님들이 이제 모두 6명, 웬만한 절집의 스님보다 많다. 이들에게는 석가모니와 대중스님은 물론, 찾아오는 사람들과 뭇 생명들이 모두 부처님이다.

정봉 스님이 전화를 받으며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이들을 부처님 대하듯 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2006년부터 블로그 보리심의 새싹(borisim.net)’을 운영하며 자신들의 수행생활을 알리고, 불교관련 영문글을 번역해 올리며 수행법을 전하는 것도 오로지 중생을 위하면서 살겠다는 서원을 지키기 위해서다. 이들이 블로그에 올린 글은 최근 ‘지리산 스님들의 못 말리는 수행이야기’(불광출판사)란 책으로 묶여 출간됐다.


김종락기자 jrkim@ munhwa.com

기사 게재 일자 2009-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