쫑카파 대사께서 쓰신 '보리도 차제광론'에 보면, 삼매에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장애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다섯 가지 장애란,
첫째, 게으름
둘째, 대상을 잊어버림
셋째, 혼침과 도거
넷째, 혼침과 도거에 대한 대치법을 쓰지 않는 것
다섯째, 혼침과 도거가 없을 때 정지견을 내지 않는 것.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불자들은, 수행은 바로 참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이제는 큰 도시마다 시민 선방이 많이 운영되고 있고, 여름과 겨울이 되면 수많은 불자들과 스님들이 선방에서 철을 나면서 공부를 하고 있다.
그러나 다소 이상한 점은...선방의 풍경하면, 푹신한 좌복에 다리와 손모양을 대충 풀고서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 떠올려질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 달리 떠올려지는 풍경이 있다면...경책하는 사람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에게 '당신 졸았소!'라고 죽비를 내리칠려고 하면...한사코 자신은 졸지 않았고 화두를 들고 있었다고 하는 바람에 사소한 다툼이 일어나는 모습이다.
물론 다소 이해하기 힘든 진풍경이 펼쳐지는 가장 큰 이유는...
참선에 대해 올바르게 지도할 선지식이 부재한 상태에서, 제대로 된 점검을 받지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참선을 지어가는데 있다.
참선수행을 하는데 중요한 것은 절대로 '얼마나 오래동안 앉아 있느냐'가 아니다. 몸과 마음에 경안이 일어나면 얼마든지 자연스럽게 오랫동안 공부를 지어갈 수 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짧은 시간을 하더라도, 정확하게! 바른 동기로써 해야한다는 것이다.
티벳의 경우, 처음으로 명상수행에 들어갈 때, 단 5분을 하더라도 정확하게 수행할 것을 권한다.
우리나라는, 주로 선방에 나가면서 참선을 배우게 되는데... 초심자들은 바른 자세와 바른 동기, 바른 선정에 대한 가르침을 받지 못한채, "화두만 들면 도통한다더라~"라는 주먹구구식의 참선을 시작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더욱이, 참선시간을 자율적으로 정하거나, 선지식의 지도아래 조절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군대식으로 50분 좌선, 10분 경행이라는 프로그램에 자신을 끼워맞추게 된다.
처음 참선을 하는 사람에게는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정확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억지로 그 긴 50분을 채우려다 보니, 다들 한 철을 나면 '앉아서 조는데'에 도통하거나 '앉아서 망상하는데' 도통하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참선을 지어나가야, 이러한 허물들을 짓지않고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있을까?
맨 처음에 언급했던 다섯가지 삼매의 장애에 대해 다시 이야기 해보자.
<티벳 문수보살님 모습:
모든 장애는 '정념'과 '정지'라는 지혜의 칼로 단숨에 잘라야 한다>
첫번째 장애, 게으름.
우선, 초심자는 참선에 재미를 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재미를 느끼는 일에서는 어느 누구도 게으름을 부리지 않기 때문이다. 노름에 재미붙인 사람이 밤새는 줄 모르고, 무릎관절이 아픈 지도 모르고 노름에 집중하듯이... 우리는 참선에 재미를 붙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 필요한 것이 있다.
하나는 세간잡사, 세속적인 일들에 대한 재미는 통찰력으로 내려놓고, 부처님 공부에만 취미를 붙여야 하는 것이다. 계율을 지키고, 부처님법에 대해 사유하고, 참회하는 등등, 모든 부처님 공부에 대한 것에는 신이나서 하고, 모든 세속적인 일에는 무관심해야 한다.
요즘 조계종에서는 '몇안거 성취'를 승가급수에 적용하는 바람에, 생사해탈이 아닌, 세속적인 이유로 선방에 들어오는 수행자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좌선시간과 쉬는 시간, 혹은 결제와 해제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극과 극을 달리고 있다. 마치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출리심이 없는 수행자들은 세간과 출세간 사이에서 곡예를 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참선을 할 때 절대로 억지로 시간을 채우지 말고, 가장 참선이 잘 되어갈 때 그만 두고, 다음 시간을 기약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 시간에도, 즐거운 마음으로 참선을 지어갈 수 있게되지, 억지로 시간을 때우면, 다음 시간에는 그만 짜증나고 질려서 또다시 억지로 공부를 지어가게 되는 것이다.
두번째 장애, 대상을 잊어버림.
삼매의 대상은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다. 화두가 될 수도 있고, 부처님의 모습이나, 진언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어떤 것이든간에, 자신이 정한 그 하나의 대상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 조금 하다가 잘 안된다고 다른 것으로 바꾸어서도 안되고, 참선중에는 자신이 정한 공부외에 다른 생각들을 허용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간혹 억지로 선방에 가서 철을 나는 일부 스님들과 불자들을 보면, 아예 한철 망상거리를 준비해 가는 사람들도 있다. 시주밥먹고 도저히 해서는 안될 일 중에 하나이다.
<혼침이 올때, 무한한 공덕을 지니신 부처님의 모습을 떠올리자>
세번째 장애, 혼침과 도거.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바로 혼침과 도거이다.
어둡게 가라앉는 무거운 마음, 이리저리 들떠서 나부끼는 마음은 선정의 독이다. 계율을 잘 지니고 탐욕(세속심)을 잘 경계한다면, 혼침과 도거를 치성하게 하는 원인들을 줄여갈 수 있다.
네번째 장애, 대치법을 쓰지 않는 것.
사실, 참선의 요령을 터득하기 전에는, 모든 사람들이 혼침과 도거의 장애를 겪게 된다. 문제가 되는 것은 혼침과 도거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혼침과 도거가 왔을 때에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알아차리더라도 이를 내버려 두는 것이 아주 심각한 문제이다.
혼침이 왔을 때는, 불법에 환희심을 돋구는 바른 생각을 일으키고, 부처님의 광명등의 사유하도록 권하고 있다. 반대로 도거가 왔을 때는, 들뜨는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무상이나 죽음에 대해 사유하도록 권하고 있다.
간혹 선방에서, 혼침도거에 대한 대치법을 위에서 이야기한 정견의 대치법을 쓰지않고, 삿된 대치법을 쓰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진한 커피를 마신다던지, 음란하거나 엉뚱한 생각을 짓는다던지, 바늘로 스스로르 찌르는 등등의 행동들이 그런 경우이다.
혼침이 왔을 때, 이를 즉각적으로 알아차리고 정견으로 대치법을 쓰되, 그래도 어려울 때는, 경행을 하거나 찬물로 세수를 한다. 그래도 되지 않을 때는 참선을 잠쉬 쉬어야 한다.
무조건 '화두만 들어라'라고 배운 초심자들이...바른 대치법을 쓰지않고, 눈치보여 경행도 하지 못하고 그저 시간가기만을 기다린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다섯번째 장애, 혼침과 도거가 없을 때 정지견을 내지 않는 것.
혼침과 도거의 장애가 없어서, 마음이 선정에 들었을 때에는, 마음을 대상에 머무르되 노력을 완화해야 한다. 이 때에, 억지로 노력을 지어가면 오히려 마음이 산란하게 된다.
<잠공 꽁툴 린포체의 모습: 지혜와 복덕을 갖춘 스승들의 모습이다>
이와 같이, 선정삼매에 장애가 되는 것들을 잘 살펴서, 바른 선정을 지어가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시작하기 이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바른 동기이다.
왜, 무엇때문에, 참선을 하는가?
언젠가 인터넷 뉴스를 보니, 어느 선방의 창건주를 인터뷰한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이 선방에서, 도인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어디 스님들만 도통하라는 법 있나요?
저희 재가자들도 도통해서 법상에 올라서 법문했으면..."
어찌보면 간절하고 기특한 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좀 더 잘 살펴보면, 문제점들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행의 동기가 보리심이 아닌, 자신의 에고나 탐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모든 수행, 그리고 참선에 대한 동기는...
반드시 생사 고해를 벗어나는데 그 뜻이 있어야 하며,
그 결과로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데 그 뜻이 있어야 한다.
도인이 되고 싶어서, 큰 스님이 되고 싶어서, 높은 법상에 올라 법문하고 싶어서,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고 아니면 신통을 얻어서 세상을 지배하고 싶어서라면....
처음부터 시작이 잘못된 것이다.
정봉스님께서는 늘 말씀하신다.
"오늘 먹을 양식이 남아 있다면, 다른 생각하지 말고 오직 공부만 해라.
오늘 먹을 양식이 떨어졌다면, 내일 탁발을 나가서 먹을 것 좀 구해오면 된다.
나는 평생동안 이런 마음으로 살았다.
그런데...토굴에 살때,
신기한 것은, 한번도 먹을 양식이 떨어진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수행자가 올곧은 마음으로 생사를 요달하려는데,
굶어죽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17대 까르마빠 존자님 : 스승은 깨달음의 현현이다
밀라래빠 십만송에 보면, 스승 밀라래빠가 제자 감뽀빠를 떠나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마지막 헤어지는 순간에, 스승은 제자에게 '나에게 지극히 심오한 핵심 교의가 있지만, 이것은 너무도 소중해서 함부로 전해주지 못한다.'며 떠라나고 한다. 그러나 돌다리를 건너는 제자를 계속 서서 지켜보던 미라래빠는 감뽀빠를 불러세워 그 핵심 교의를 전해줄테니 오라고 했다.
그리고...
단숨에 달려온 제자에게 스승이 전한 핵심 교의는 바로...
피부가 온통 굳어져 피멍과 상처의 흔적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이었다. 밀라래빠는 옷을 걷어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것보다 더 심오한 가르침은 없다. 보아라! 내가 어떻게 정진을 하였는지!
불교의 가장 심오한 가르침은 바로 '수행'이다.
내가 공덕과 성취를 이룬 것도 오로지 이 끊임없는 정진의 결과이다.
그대 또한 흔들림없는 마음으로 명상하여라!"
바른 스승의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 바른 동기로 바른 수행을 할 수 있다면...
우리가 인간 몸 받은 것을 가장 뜻 깊게 회향하는 것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