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메사원의 강당, 교실의 모습. 지금 한창 신축공사 중이다)
규메사원은 겔룩파에 속한 밀교사원이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티벳어, 경전이외에도 만달라, 버터조각, 탕카(탱화)만드는 법과 요가를 배운다. 처음 스님이 되면 예불의식과 티벳어, 영어 그리고 기본적인 불교철학을 배우고 그 과정이 통과되면 좀더 어려운 불교철학과 불교식 토론도 배우게 된다. 처음 과정은 3년에서 5,6년까지 걸리고 다음 과정은 다시 5년이 걸린다.
이러한 현교의 과정을 마친 사람만이 밀교의 과정을 다시 배울 수 있다고 한다. 매년 새해에는 구두와 서술로 이루어지는 시험을 치르게 되어있다. 이 시험에 통과해야만 새로운 학년으로 올라갈 수 있게 된다.
우리 나라의 스님들 교육에는 이러한 유급제도와 시험제도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어찌보면 포용적이고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승가의 천년대계를 생각한다면 구렁이 담 넘어가는 식의 교육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규메사원 내의 도서관의 모습, 중국어와 티벳어로 된 경전과 논서등이 있다)
티벳스님들이 유독 교리에 강하고 설법에 있어 풍부한 것은, 철저한 시험제도뿐만이 아니라 불교식 토론교육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토론은 두명이 짝이 되어서 그 날 배운 내용을 묻고 대답하면서, 자신이 배운 내용을 완전히 소화하게 된다. 이렇게 철저히 교학을 배우는 과정이 최소한 10년 정도 걸리니, 설법과 수행의 길에 막힘이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승가의 교육은 유교적 토대가 강한 이유에서인지, 건전한 토론문화가 빈약하다. 교리상의 의문사항을 질문하거나 생각이 다르다고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버릇없는 사람, 피곤하게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한국불교는 유독 말로 설명하는 것에 약하다.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은 그 모든 허술함을 덮어주는 최상의 변명거리로 타락한지 오래다.
이는 단순히 4년이라는 짧은 교육기간 탓만은 아닐 것이다. 이해하기도 어려운 한자로 이루어진 경전을 따로 한자교육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배우게 되니, 한자난자 찾기에 대부분의 시간을 소모하게 된다. 또 선이 최고라 해서 경전공부 자체가 경시되고 강원교육에서조차 대중화합과 운력이 학인의 교육보다 더 우선시 되니, 그 누가 경전의 내용을 자기화하여 수행의 밑거름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새벽마다 수행중인 원주스님)
우리가 티벳의 사원을 탐방하고 나서 받은 가장 큰 충격은 바로,
우리나라 불교의 정체성이 유교와 너무 혼합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한국불교는 겉으로는 분명히 불교인데, 그 불교를 구성하고 있는 승가와 재가 신도의 사고방식은 불교적이 아니라 오히려 유교적이다.
서열을 중시하고, 체면을 중시하고, 줄맞추기 좋아하고, 절하기 좋아하고... 법랍에 대한 서열을 우선으로 강요하는 한국불교. 그래서 이러한 한국 불자의 눈에 비춰지는 티벳불교는 오히려 지저분하고, 어수선하고, 갑갑한 모양이다.
그러나 티벳불교는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그 생활 곳곳에 지혜와 자비의 실천이 스며들어 있다.
규메사원의 경우, 3년에 한번씩 모든 스님들이 방을 바꾼다. 이는 숙소자리에 대한 불공평을 해소하고 또 특정장소에 대한 집착을 없애기 위해서란다.
또한 소임자 스님들은 소임기간 동안 정말 철저하게 대중을 위해 봉사를 하면서도, 어떠한 특권도 누리지 않는다. 오히려 소임은 수행의 연속이다. 규메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새벽마다 게스트하우스 한편에 있는 원주실에서 정진하시는 원주스님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더구나, 우리의 예전 승가가 그러했듯이, 티벳 절의 주지 소임을 맡게되는 스님은 법에 정통한 스님이어야만 한다. 따라서 티벳사원을 방문했을 때, 법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이 있으면 주지스님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는 노스님, 어떤 스님은 설탕을 사서 개미에게 보시하시기도 한다)
그럼 과연 우리의 승가는 어떠한가? 모든 부분에서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교육의 차원에서 보면, 우리는 실속보다는 겉치레가 더 많아 보인다. 우리의 승가도 겉치레 예의범절을 넘어서는 실속 있는 자비의 승가로 거듭 나기를 바래본다.
최고의 禪을 배우려면, 최고를 수용할 수 있는 기본적인 바탕이 이루어져야 함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가장 기본적인 계율이 무너진 상태에서 최고의 禪만을 고집하는 것은 한 쪽 날개로 하늘을 나는 새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 기본적 바탕인 계율를 바로 세우기 위해, 승가의 지도자 스님들은 당연히 계로서 모범을 보여야 하고, 배우는 학인 스님들도 세속심이 아닌 계율로서 하나가 되는 승가를 이루어야 한다. 계가 무너진 승가는 승가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다. 우리 승단이 철저한 계율로 장엄되어 다시금 부처님의 법이 찬란히 꽃피어 나길 간절히 바래본다.
규메사원은 겔룩파에 속한 밀교사원이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티벳어, 경전이외에도 만달라, 버터조각, 탕카(탱화)만드는 법과 요가를 배운다. 처음 스님이 되면 예불의식과 티벳어, 영어 그리고 기본적인 불교철학을 배우고 그 과정이 통과되면 좀더 어려운 불교철학과 불교식 토론도 배우게 된다. 처음 과정은 3년에서 5,6년까지 걸리고 다음 과정은 다시 5년이 걸린다.
이러한 현교의 과정을 마친 사람만이 밀교의 과정을 다시 배울 수 있다고 한다. 매년 새해에는 구두와 서술로 이루어지는 시험을 치르게 되어있다. 이 시험에 통과해야만 새로운 학년으로 올라갈 수 있게 된다.
우리 나라의 스님들 교육에는 이러한 유급제도와 시험제도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어찌보면 포용적이고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승가의 천년대계를 생각한다면 구렁이 담 넘어가는 식의 교육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규메사원 내의 도서관의 모습, 중국어와 티벳어로 된 경전과 논서등이 있다)
티벳스님들이 유독 교리에 강하고 설법에 있어 풍부한 것은, 철저한 시험제도뿐만이 아니라 불교식 토론교육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토론은 두명이 짝이 되어서 그 날 배운 내용을 묻고 대답하면서, 자신이 배운 내용을 완전히 소화하게 된다. 이렇게 철저히 교학을 배우는 과정이 최소한 10년 정도 걸리니, 설법과 수행의 길에 막힘이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승가의 교육은 유교적 토대가 강한 이유에서인지, 건전한 토론문화가 빈약하다. 교리상의 의문사항을 질문하거나 생각이 다르다고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버릇없는 사람, 피곤하게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한국불교는 유독 말로 설명하는 것에 약하다.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은 그 모든 허술함을 덮어주는 최상의 변명거리로 타락한지 오래다.
이는 단순히 4년이라는 짧은 교육기간 탓만은 아닐 것이다. 이해하기도 어려운 한자로 이루어진 경전을 따로 한자교육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배우게 되니, 한자난자 찾기에 대부분의 시간을 소모하게 된다. 또 선이 최고라 해서 경전공부 자체가 경시되고 강원교육에서조차 대중화합과 운력이 학인의 교육보다 더 우선시 되니, 그 누가 경전의 내용을 자기화하여 수행의 밑거름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새벽마다 수행중인 원주스님)
우리가 티벳의 사원을 탐방하고 나서 받은 가장 큰 충격은 바로,
우리나라 불교의 정체성이 유교와 너무 혼합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한국불교는 겉으로는 분명히 불교인데, 그 불교를 구성하고 있는 승가와 재가 신도의 사고방식은 불교적이 아니라 오히려 유교적이다.
서열을 중시하고, 체면을 중시하고, 줄맞추기 좋아하고, 절하기 좋아하고... 법랍에 대한 서열을 우선으로 강요하는 한국불교. 그래서 이러한 한국 불자의 눈에 비춰지는 티벳불교는 오히려 지저분하고, 어수선하고, 갑갑한 모양이다.
그러나 티벳불교는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그 생활 곳곳에 지혜와 자비의 실천이 스며들어 있다.
규메사원의 경우, 3년에 한번씩 모든 스님들이 방을 바꾼다. 이는 숙소자리에 대한 불공평을 해소하고 또 특정장소에 대한 집착을 없애기 위해서란다.
또한 소임자 스님들은 소임기간 동안 정말 철저하게 대중을 위해 봉사를 하면서도, 어떠한 특권도 누리지 않는다. 오히려 소임은 수행의 연속이다. 규메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새벽마다 게스트하우스 한편에 있는 원주실에서 정진하시는 원주스님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더구나, 우리의 예전 승가가 그러했듯이, 티벳 절의 주지 소임을 맡게되는 스님은 법에 정통한 스님이어야만 한다. 따라서 티벳사원을 방문했을 때, 법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이 있으면 주지스님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는 노스님, 어떤 스님은 설탕을 사서 개미에게 보시하시기도 한다)
그럼 과연 우리의 승가는 어떠한가? 모든 부분에서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교육의 차원에서 보면, 우리는 실속보다는 겉치레가 더 많아 보인다. 우리의 승가도 겉치레 예의범절을 넘어서는 실속 있는 자비의 승가로 거듭 나기를 바래본다.
최고의 禪을 배우려면, 최고를 수용할 수 있는 기본적인 바탕이 이루어져야 함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가장 기본적인 계율이 무너진 상태에서 최고의 禪만을 고집하는 것은 한 쪽 날개로 하늘을 나는 새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 기본적 바탕인 계율를 바로 세우기 위해, 승가의 지도자 스님들은 당연히 계로서 모범을 보여야 하고, 배우는 학인 스님들도 세속심이 아닌 계율로서 하나가 되는 승가를 이루어야 한다. 계가 무너진 승가는 승가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다. 우리 승단이 철저한 계율로 장엄되어 다시금 부처님의 법이 찬란히 꽃피어 나길 간절히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