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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이야기(India)/인도티벳사원2005

인도속의 티벳사원 제 1탄- 뱅갈로르에서 규메사원 가기


                   (규메사원 입구의 오솔길, 아침에 포행하는 스님들의 모습)                         

동국대 재학시절, 해외탐방 장학생으로 선출되어서 비행기값과 약간의 체류비를 지원받아 난생 처음 인도 땅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우리는 남인도를 거쳐 북인도에 이르기까지 인도에 망명 온 티벳사원들을 탐방하기로 되어 있었다. 2주간의 짧고 빡빡한 일정에 많은 무리가 따랐지만, 그래도 우리가 만나는 많은 티벳스님들의 자비로운 모습과 선지식들의 지혜로운 가르침 덕에 힘든 줄 모르고 강행군을 하게 되었다.

인천에서 출발하여 뱅갈로르에 도착한 것은 밤 늦은 시각이었다. 거의 5배 가격으로 택시값을 부르는 인도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기적적으로 가격을 흥정하여 가까운 게스트 하우스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1박한 후, 아침이 되자 기차를 타고 마이소르로 이동하여 다시 택시를 타고 (약 400루피) 훈수르에 있는 규메사원으로 향했다. (규메사원에 가려면 택시기사에게 '바라 라마 캠프'로 가자고 하면 된다. 혹시 세라나 남돌링 사원을 가고자 하면 '바일라쿠페'로 가자고 하면 된다.)

그러나 서로 우리를 태우려는 기사들의 힘겨루기 싸움 끝에 경찰까지 개입이 되고, 그 싸움에서 패배한 기사들이 우리에게 눈물로 하소연하는 좀 복잡다난한 일련의 과정이 지나서야, 겨우 규메로 가는 택시를 탈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때부터 아주 수월하게 규메까지 간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택시 기사가 가는 도중에 자동차 주유뚜껑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가야만 했고, 티벳마을이 나타나자 운전사가 우리를 대충 내려놓고 가버리려 하다가, 지나가던 티벳인이 규메사원을 한 참 더가야 한다고 우리에게 귀뜸해준 덕분에 다시 내리던 짐을 싣고 규메까지 갈 수가 있었다.

              (규메사원의 일주문 모습, 야채와 과일을 자전거에 싣고 팔러온 인도인)

드디어 규메도착!
사원 입구의 노란색 일주문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지나가던 스님에게 초펠스님이 적어준 편지를 보여주자 우리를 게스트하우스로 안내해주었다. 조금 기다리니, 초펠스님의 은사스님인 뗀펠 노스님과 소임자, 또 사원일을 봐주는 처사님이 함께 오셨다.

초펠스님은 편지에 몇가지 당부를 하셨다. 우리가 채식을 하니, 음식을 채식으로 제공해 줄 것과 근처의 사원을 다닐때는 노스님은 동행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것 등이었다. 그 이유는 노스님이 너무나 자상하셔서 혹시나 다른 사원을 가게 되었을 때, 당신이 보여주고 싶은 곳을 일일히 안내하시면, 우리가 자율적으로 탐방을 못할까봐 걱정이 되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노스님은 그 편지를 읽으시더니 크게 웃고 마신다. 결국 그 다음날 세라사원으로 가는 지프차안에는 노스님이 제일 먼저 타고 계셨다. ^^

규메사원은 550명의 스님들이 살고 계신다. 아주 어린 동자승부터 노스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450명 정도가 티벳에서 온 스님들이라고 한다. 티벳사원의 구조는 대게 비슷한데, 법당과 강당, 도서관 그리고 스님들의 숙소로 이루어져 있다. 강당은 학교 교실처럼 나뉘어져 있고, 숙소는 4~6개의 방이 한 동을 이루고 있다. 또 한 방은 두개로 나뉘어져 있는데, 두 공간사이에는 약간의 벽만 있을 뿐 문이 없다.

             (규메스님들의 숙소모습, 전기사정으로 아침이면 나와서 독경을 한다)                                  

처음 절에 오게 되면 은사스님과 같은 방을 쓰게끔 되어있다고 한다. 그래서 은사스님은 가사입는 법, 빨래하는 법, 음식하는 법 등을 손수 보여주시면서 가르치신다고 한다. 처음 출가하면 행자라고 해서 다른 옷을 입고, 행자방에서 생활하면서 은사스님과는 서먹하고 어려운 관계를 유지하는 한국의 풍토와는 좀 다른 모습이었다.

티벳승가의 모습은 한국승가보다는 자비심과 자율성의 모습이 많이 엿보였다. 노스님을 시봉할 때도 당신이 혼자 힘으로 하실 수 있는 부분은, 시자들이 돕지 않았다. 유교문화권에 있는 우리들에게는 다소 야박하게 보일지 몰라도, 결코 죽음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원칙을 가진 수행자로서의 당당함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