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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이야기/지혜

어떤 분을 선지식으로 삼아야 하나요? 제 3편 자비심

                                             <자비의 사천왕 모습>

대승 보살의 자비심에는 두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공성을 체득하기 전에 발하는 자비심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공성을 체득한 후의 자비심이다. 공성을 체득하기 전의 자비심이란 우리가 마음으로 짓는 것이지만, 공성을 체득한 이후의 자비심은 저절로 발현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성을 체득하면 실재가 없는 것을 실재한다고 착각하여 고통을 받고 있는, 모든 존재에 대한 연민심이 저절로 발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의지하는 선지식은 앞에서 이야기한 계율, 공성에 대한 지혜와 더불어 자비심을 구족한 분이어야 한다. 자비심은 그저 남들에게 온화하고 부드럽게 대하는 마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보리심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도 있는데, 일체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 수 있는 정확한 지견을 가지고, 때로는 엄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갖가지 방편을 써서 중생들을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진정으로 자비로운 스승 곁에 있으면, 일체중생에 대한 원력은 더욱 커지고, 공성에 대한 이해또한 더욱 깊어지며, 대승보살의 삶에 대한 뚜렷한 지견이 생기며, 갖가지 방편에 대한 이해가 생기며, 오직 보리심-일체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깨달음의 마음-을 발하는 데에 내 모든 것을 바치게 된다.

우리나라의 수행전통은 주로 공성을 깨우치는데 치중해 있다. 물론, 진정으로 공성을 체험하면 자비심은 저절로 발현되어 대승보살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아직 공성을 깨우치지 못한 수행자는 항상 자비심과 원력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자비심과 원력에 대한 올바른 이해없이 공부하는 수행자는, 각박하고 조급한 마음으로 흐르기 쉽다.

보통 자비와 지혜를 새의 양 날개로 비유하는 것은, 이 둘이 결코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이, 공성에 대한 진정한 지혜가 '자비'라는 모습으로 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공성을 깨우치기를 원하는 수행자는 자신의 삶이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를 이익되게 하는 삶, 자비와 원력의 삶이 되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계율, 공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 그리고 자비심은 우리가 의지해야 하는 선지식의 덕목일 뿐만 아니라, 우리 수행자 모두가 실천해야 하는 덕목이기도 하다. 바깥의 선지식은 내면의 선지식을 만나기 위한 전단계다. 만일 내 주변에 아직 믿고 의지할 말한 스승이 없다고 생각되면, 스스로 계율을 지키고, 부처님과 여러 조사스님들의 가르침 속에서 공성에 대한 이해를 갖추어 나가고, 늘 자비스러운 마음으로 원력의 삶을 산다면... 우리 내면의 스승을 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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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존  금강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