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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이야기/인욕

우리가 나혜석을 그리워하는 이유

대자유인의 몸짓,
나혜석은 타협하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나혜석'을 검색해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녀를 그리워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최초의 여성화가, 신여성, 특이한 신혼여행, 이혼후의 딴지걸기, 파격적인 소송, 행려병자로 마친 일생... 그녀의 삶은 지금 보아도 한편의 영화이다. 만일 현대에 나혜석과 같은 인물이 나오면 어떠할까? 아마도, 현대에 나혜석과 같은 인물이 있더라도, 예전에 그러했듯이 또다시 돌팔매질 당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만일 현대의 잘나가는 여류화가가 나혜석이 했던 것처럼, 자신과의 약속을 어겼다고 간통한 애인에게 소송을 걸었다면, 그녀의 홈피는 수많은 악플로 가득 메워지지 않았을까. 예나 지금이나, 여성의 성은 우리 사회가 정해놓은 테두리안에서만 허용되고 있기때문이다.


현대인들이 나혜석을 그리워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시간적 간격때문이다. 강건너 불구경하듯이, 자존심이 상하지 않고 구경할 수 있기때문이다. 대다수가 '정당한 윤리'라고 믿는 어떤 것을 공격하면, 그 사람은 꼭 십자가에 못박히게 되어있다. 대다수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보편적인 삶을,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나타나 '참, 어리석게 사네. 자유란 이런거야.'라고 말한다면, 어느 누가 '그래, 니말이 맞다. 우리가 참 바보같이 산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 당시의 나혜석은 쉽게 말해 도를 넘었다. 조선 남자를 조롱하고, 유식계급의 여성또한 비웃고, 전통적인 정조관념에는 침을 뱉고, 본격적으로 친일의 길을 걷고 있는 최린에게 의도적으로 소송을 제기했으니...그녀는 더이상 세상사람들 사이에서는 발디딜 곳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마지막으로 발길을 돌린 것은 절이였다. 옛친구인 김일엽이 스님이 되어 살고 있는 예산의 수덕사. 그러나 그녀는 절집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만공스님에게 출가하고 싶다고 말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수덕사 견성암이 아닌 수덕여관에서 짐을 풀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만공스님이 나혜석을 거절했던 이유가 그녀에게 강하게 남아있던 '모정'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그저 작은 오해일 뿐이다. 김일엽스님의 아들이 어머니가 그리워 수덕사에 찾아왔을 때, 나혜석이 그 아들을 데리고 자면서, 자신의 젖무덤을 만지게 했던 유명한 일화가 있다. 사실, 모정이란 아주 강한 집착이면서도 동시에 자비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나혜석의 강한 모정이 아니라, 그것을 자비로 전환시켜주지 못했던 당대 선지식의 능력부족이 아니었을까.


그녀가 남긴 마지막 글인, '해인사의 풍광'을 보면,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체 불교에 있어서는 선종, 교종으로 나뉘어 있으니 선종이라는 것은 소위 사교입선이라 해서 불타의 교리를 문자 상을 통해서 그 일람을 해석한 후에 다시금 실제에 들어가 진리를 체득하는, 즉 이문자(글자의 떠남)외에 실제 진여지리를 체득하여 대오철저를 목표로 하는 참선인을 말함이오...'


이 긴 글은 '삼계 대성인 석가모니의 법도량에서 청정한 몸으로 길들이는 승려생활이란 참으로 신성한 가운데 인천의 대법기를 이루는 것으로서 가히 부러워 아니할 수 없다'라고 끝을 맺고 있다.

수덕여관에 살때부터 삭발은 하지 않았지만, 승복을 입고 살았다는 그녀. 수덕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에, 마곡사, 해인사 등을 전전하며 반승반속의 삶을 살았다. 모든 사람들이 그녀가 최린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을 취하한 조건으로 수천원을 받은 것은 알고 있지만, 그녀가 그 돈을 모조리 수덕사에 기부한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똑같은 신여성으로 당시에는 허용되지 않는 자유를 누리며 산 두 여성. 왜 한 사람은 절집에서 받아들여져 그 일원이 될 수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절집 문밖을 떠도는 신세가 되었을까.


김일엽스님은 만공스님의 바램대로, 수덕사 여승당의 입승으로 선방을 지키는 어른이 되어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태어났던 그 친구 나혜석은, 행려병자로 그 삶을 마감했다. 아마, 만공스님은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혜석은 절집이라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마지막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똑똑한 물고기'였다는 것을. 요즘 어떤 사람이 나혜석의 마지막 생을 '무애행의 실천'이라고 해석해서 화제가 되고 있다. 가정을 꾸리고, 사랑하는 남편, 아이들과 함께하는 삶이 보편적으로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그녀의 마지막이 참 불행한 선각자의 삶이라고 평가할 수 도 있다. 그러나 보편적인 삶을 넘어 새로운 의식의 각성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무연고자로 숨진 그녀의 삶을 통해, 나혜석은 분명 한 차원 높은 의식으로 이 생을 마감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선방에서 삶을 마감한 김일엽스님보다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한 나혜석이 더욱 기억되어지는 이유는 바로 그녀의 타협하지 않는 용기, 어느 그물에도 걸리지 않았던 용기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나혜석을 그리워하는 분들. 당신은 지금 어느 그물에 걸려 망망대해를 맘껏 헤엄치지 못하고 있는지...

은사스님방의 창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붙어 있다.
"과연 기댈 곳이 있는가? 있다면 죽어라."
"그러면 과연 기댈 곳이 없는가? 없다면 죽어라."
타협하지 않는 자유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많은 이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이 글을 읽고, 막행막식하는 것이 타협하지 않는 자유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오욕락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진정한 자유를 잃은 사람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