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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上正等正覺

정봉스님께서 30대 초반에 불법을 처음 만나셨을 때의 이야기이다.
언젠가 먹지도 않은 채 지리산을 일주일동안 걸으면서,
스님께서 증득한 바를 행선으로 점검하신 적이 있으셨다.

오직 찬란하게 깨어있는 마음으로,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
숨을 내쉬고 들이쉬고, 다리 하나 들어올리는 것,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
이 모든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철저하게 주시하면서,
고요와 적정 속에서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셨다.
요즘 사람들이 빠르면 하루만에도 다녀오는 산행을, 일주일 동안 하셨으니 얼마나 깨어있는 마음으로 걸으셨겠는가?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밤이 되면 나무 밑에서 명상을 하고...그렇게 일주일을 '철저한 깨어있음과 알아차림'으로 수행하시면서,
당신의 깨달음을 또 다른 행법으로 점검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일주일간의  수행을 마치고 나서,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의 큰 도인스님이 누가 계시냐'고 물어보니, 몇몇은 성철스님이라고 하고, 몇몇은 혜암스님이라고 하기에, 해인사로 향하셨다.

그러나, 성철스님이 계신다는 백련암을 먼저 올라가 보니, 그 입구에 살아있는 소나무에 대못을 박아 '침묵하시오'라고 쓴 푯말을 붙여 놓은 것을 보고 '과연 도인의 도량이 맞을까'하는 의구심이 들으셨다. 또 올라가는 길에 삼천배를 채우지 못해서 친견도 못하고 그냥 내려가는 다리 불편한 노보살님을 보면서...
세상의 권위에 의지하지 않은 채, 당신의 순수하게 깨어있는 의식으로 살펴보니,
성철스님은 지혜와 자비를 완전하게 갖춘 위대한 도인은 아니라는 판단이 나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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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당암에서 혜암스님과 함께, 혜암스님께서 스님께 주신 법명은 碧眼이었다.>


마침 그 날이 해제일이라서, 수많은 사람들이 해제법문을 들으러 모인 상황이었다.

스님께서도 백련암을 내려와서 법문을 들으러 법당에 들어가려고 하다가, 일주일 동안 씻지도 않아서 수염으로 덮힌 당신의 모습을 살피시고는, 급히 계곡으로 내려가서 세수를 하고 혹시 몰라서 비닐에 넣어두었던 옷으로 갈아입으셨다.

그 때, 해제 법문은 혜암스님께서 하셨는데, 어른 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무나 마음에 쏙 들어서 개인적으로 다시 친견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고 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조금 전에 법문하신 분이 누구시냐고 물어보니 사람들이 원당암 혜암스님이라고 해서 원당암으로 올라가셨다. 어른 스님께서 시간이 되어 방으로 들어오시면서, 입구에 앉아있던 당신을 쳐다보셨다.

그 때, 스님께서는 혜암스님께 지극하게 절을 올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다.
"저의 마음은 청정하여 한 점 티끌도 없으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왔습니다."

그러자 혜암스님께서는 환하게 웃으시면서, "그것이 바로 대승의 마음이다."고 하시면서, 당시에는 처사였던 스님을 앞으로 불러서 정성스럽게 붓글씨로 무언가를 쓰셔서 봉투에 담아 주시면서, "참구해 보십시요"라고 하셨다.

스님께서, 해인사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그 봉투를 열어보니,
"부모미생전 본래면목" 이라고 쓰여있었다고 한다.

스님께서는 그 글을 보는 순간 입가에 미소가 번지셨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게송을 적어 편지로 보내드렸는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어른스님에 대한 도리가 아닌 것 같아, 직장일이 다 마친 시간에 서둘러 다시 해인사로 향하셨다.

스님께서는 그 때 시내버스 운전을 하셨는데, 일을 마치고 터미널로 가니 때마침 마산가는 막차가 있어서 그것을 타고, 다시 마산에서 고령가는 막차를 타고 고령에 내리셨다. 한 밤중이어서 칠흙같이 어두웠는데, 지나가는 길에 있는 검문소의 의경들이 스님께서 해인사를 간다고 하니, 지나가는 차를 세워, 운전사에게 좀 태워주기를 부탁했다.

결국 그 차는 해인사에서 떨어져 있는 읍내까지 스님을 태워주어서, 거기서부터 해인사까지 걷기 시작하셨다.

칠흙같이 어우운 길을 밤새도록 걸어서, 새벽 두 시 쯤 일주문에 도착하자,
스님께서는 지극한 마음으로 땅바닥에 엎드려 삼배를 올리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부처님, 불보살님,
 부모미생전 본래 면목을 보니,
 이제 거짓된 저 개인의 삶은 끝났습니다.
 앞으로 세세생생 날적마다, 오직 부처님 은혜갚는 일만 하며 ,
오로지 중생을 생사고해에서 건지겠습니다.
 제불보살님께서는 증명하옵소서."

그러자 스님앞에 있던 큰 나무가 갑자기 광명을 발하기 시작했다. 스님께서는 그 나무의 조각을 조금 떼어 가방에 넣고 다시 원당암으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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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숭산스님, 진제스님, 정봉스님. 이 때 정봉스님은 모든 것을 감추고,
             부목처사로 해운정사에서 진제스님을 3년 동안 모시고 살았다.
             세 분은 이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세계로 향하는 태종대로 가셨다.>

이른 새벽에 원당암에 오르는 다리에 다다르자, 혜암스님께서는 미리 그곳까지 나와 계셨다. 스님께서는 혜암스님께 "제게 적어주신 글(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을 보고, 편지를 보내드렸는데... 어른스님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이렇게 직접 찾아뵙고 말씀드리러 왔습니다."고 하면서, 당신의 깨달은 바를 말씀드리니, 혜암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인가하노라. 다시는 퇴전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오래도록 드러내지 말아라."

그리고 나서, 혜암스님께서 스님과 함께 오래동안 도량을 거닐면서 이야기를 나누셨다. 마침 아침 공양시간이 지나서, 혜암스님의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공양주 보살님이 겸상을 차려놓고, 공양을 드시라고 말씀 드렸다.
혜암스님께서도 같이 아침 공양을 하자고 권하셨으나, 스님께서는 "이미 배가 부릅니다."라고 하니, 어른 스님께서도 웃으시면서 보내주셨다.(1986년 초가을)

영가 스님이, 육조 혜능스님에게서 법을 인가 받은 후에, 육조스님이 오래도록 같이 머무르자고 하여도, 하루밤만 자고 떠났기에 "일숙각"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스님께서는 하루밤은 고사하고 한끼 식사도 같이 하지 않으시고 발걸음을 돌리신 것이다.
그때 스님께서는 왜 그러셨을까?
아마도... 먼 훗날, 우리 불교의 앞 날을 내다보신게 아닌가 생각된다.(이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있으셨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스님께서는 집에 돌아와서, 문득 무심코 가방에 넣어 둔 나무 조각이 생각나서,
보살님을 불러 꺼내 보셨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그 빛이 보살님을 기다렸다는 듯이, 나무 조각 끝부분에 남아있다가 보는 순간 스르르 사라져버렸다.
보살님은 그 빛을 보는 순간, 너무나 환희롭고 또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
공부하러 가실 수 있도록 바로 이혼을 하고, 스님을 보내드리게 되었다.
그래서 스님께서는 구도의 길을 원력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출가를 하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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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제스님 생신날, 진제스님께서 주신 법명은 無上이었다.>

 20여년이 지난 요즘에서야 스님께서는 가끔씩 인연이 닿는 분들에게... 위와 같은 이야기를 방편으로 제도하시기 위해서 들려주실 때가 있다.

'깨달음'이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는
그 위대한 '보편적이고 평등한 깨달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세속적으로 많이 배우지 않았고,
이름난 재가불자도, 스님도 아니었던,
시내 버스를 운전하던 가난하고 평범한 한 가장이...
생사가 없는 이 위대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수년간을 철철히 선방에서 안거를 나면서, 법랍이 오래된 선방 수좌 스님들...
많이 배우고 많이 알아서, 불교에 대해서 스스로 박식하다고 여기는 학자들...
선방이나 강원에서 후학을 지도하는 분들...
나름대로 용맹정진으로 스스로를 채찍질 하던 수행자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가 깨달음에 가장 가깝게 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더욱 어려워지고 있는 것은,
그 동기가 생사해탈에 있지 아니하고,
큰스님, 도인이라는 명예와 권위...특별함을 바라기 때문은 아닌지....

스님께서는 당신께서 깨달음을 얻고, 인가받게 된 이야기를 하실 때면,
늘  하시는 말씀이 있다.

"참 희한하재...
 나처럼 무식하고,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놈에게 기적이 일어났다니...
 많이 배운 사람들에게 이 일이 일어났으면, 참 좋았을텐데...
 난 그 날 이후로 모든 의문이 사라져 버렸어.
 그 순간 내가 안 것은
 내가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
 죽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언제나 생사에 자유롭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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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수스님과 함께, 성수스님께서 주신 법명은 進靈이었다.>

아직도, 많은 불자들이 스스로 철저하게 사유하지 않은 채,
세상에서 인정하는 "권위"에 눈이 멀어서,
누가 올바른 도인인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일이 많다.
(사실, 이 부분은 스스로의 안목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름난 도인들의 권속들은...
세상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또 문중의 영광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가 직접 보아왔던 바르지 못한  허물들에 대해서...
다 같이 침묵을 지키고 마는 것이 우리의 슬픈 현실이기도 하다.

스님께서는 작년에 마지막으로  까르마빠 존자님을 단체 친견할 때,
줄지어 서 있는 대중들 맨 끝에서 발걸음을 옮기시면서, 이렇게 발원하셨다.

"존자님께서는 법왕으로써, 높은 곳에서 이 수많은 중생들을 이끌어 주십시오.
 저는  가장 낮은 곳에서,
 일체 중생이 깨달음에 들때까지,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 제 할 일을 하겠습니다."


스님의 삶은...

한산과 습득처럼,
원효스님과 대안스님처럼,
보화와 암두처럼,
방거사와 부설거사처럼,
혜월스님, 수월스님처럼...

늘 세상 사람들이 다가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서,
우리들과 함께 울고 함께 웃으시면서,
그 가슴 가슴마다 깨달음의 씨앗을 심어주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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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대 까르마빠 존자님과의 개인친견 후에>

(혹시 이 글로 인해, 은사스님께 누가 되지 않을까 내심 걱정이 된다. 만일 이 글에 허물이 있다면 모두가 나의 부족한 안목때문이라고 밝혀두고 싶다. 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