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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이야기/지혜

깨달음의 반야, 지옥에 갈 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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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리심의 새싹>



흔히들 불교의 핵심사상이 '공사상'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이 '공사상'을 제대로  증득하지도 않고,
머리로만 이해한 상태에서, '바른 견해'와 '자비심'을 갖추지 못한다면,
참으로 어처구니 없고 슬픈 일이 벌어지게 된다.


지금까지 여러 수행자들을 만나면서,
생각한 것 보다, 훨씬 심각하게,
우리나라의 수행자들이 '아전인수'격인 공사상에 너무나 익숙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육식을 하는 스님들이 대부분 이렇게 자기 변명을 한다는 것이다.
"먹는 것에 시비심이 있어서, 어찌 도를 깨치겠는가?"
"청정함에 빠져 있고, 계율에 갇혀 있어서, 어찌 깨달을 수 있겠는가?"

또 어떤 수행자들은 이렇게도 이야기 한다.

"먹고 싶어도 참아가면서 자신을 속였는데, 이제는 수행을 하면서 알아차림으로 나를 살피게 되니, 그런 억지 행동은 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먹고 싶으면 먹고, 또 먹고 싶지 않으면 먹지 않게 되는...그런 자연스러운 삶을 살게 되었다."라고...

이러한 수행자들의 변명은,
술을 마시는 문제, 세속적인 것을 즐기는 문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래서 많은 수행자들이 TV를 보면서도, 자신은 화두를 들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세속적인 욕망대로 살아가면서, 스스로는 공부를 하고 있다고 장담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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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상대사 법성도>


그러나 이러한 논리들은, 우리가 조금만 깨어있는 의식으로 살펴보면,
너무나 우스운 '자기변명'일뿐,
부처님의 참다운 가르침과는 어긋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청정함에 빠져 있으면 안된다고 하는 스님에게, 똥 오줌을 주면서 먹어보라고 해보자. 과연, 모든 분별을 끊고 주는대로 받아 먹는 수행자가 몇이나 될까? 똥 오줌은 고사하고, 조금 오래된 반찬도 안 먹으려 할 것이다.

또, 드라마를 보면서도 화두가 성성하다고 하거나, 술과 담배도 끊지 못하면서 참선한다고 하는 수행자에게... 펄펄 끓는 뜨거운 물에 손가락을 담가보라고 해보자.

과연 부처님께서 인욕행을 하셨던 것처럼,
온 몸이 조각조각나는 상황에서도, 화두가 성성하다고 할 수 있을까...

비록 깨달음의 자리가, 선악분별을 초월한 자리라고 해도, 그 자리에 가기 위해서는 지극히 선한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털끝만한 악행도 짓지 않는 것이 계이고,
선법을 원만하게 봉행하는 것이 정이고,
자기의 몸과 마음을 원만하게 조복할 줄 아는 것이 혜이다."


정봉 무무스님께선 늘 말씀하신다.

"선지식들은 깨달은 사람을 기특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 존재계에서 가장 귀한 사람은 보살행을 하는 이들이다."

생각해 보라. 깨달음이라는 것은, 자신과 타인을 가장 이롭게 하는 일인데...
연기의 법으로 이루어진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깨달음을 이루려고 하는 이들이,
마구 행동하고, 마구 먹어대서야, 깨달음에 대한 자격이 주어지겠는가?

이에 대해, 티벳의 8대 까르마빠는 <불공 회향 기원문>에서 이와 같은 말을 남기셨다.

"불법을 수행할 자유는 부족하면서,
불법에 어긋나는 일에는 자유로운 듯 보이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음에 회향합니다.
깨달음을 성취할 반야는 조금밖에 없으면서,
지옥을 성취할 위대한 반야를 지니고 있는 듯한, 그런 사람이 되지 않음에 회향합니다."

우리가 이 사바세계, 연기의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자비심이 결여된 '공사상'은 부처님께서 뜻하신 바가 아닌 것이다.


공사상만큼, 연기법을 제대로 이해한 수행자는,
음식에 대한 분별이 없을지언정, 남의 살을 먹는 일은 피하게 되고,
술을 먹어도 화두가 성성할지언정, 후학을 위해 술을 끊게 되고,
TV를 보면서도 공부가 될지언정, 그 시간에 좀 더 깊이 있는 수행을 하게 되는 것이다.

정봉스님께서, 가끔씩 물어보신다.
"우리나라 불교 전통에서, 선지식들이 선에 대한 게송을 읊은 다음에, 왜 꼭 '나무아미타불'을 하는지 생각해 봤나? 이 도리를 알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게 된다."

선악을 초월한 자리, 계율을 초월한 그 자리는,
선함과 계율이 몸과 마음에 익어서,
악한 행동을 할래야 할 수 없고,
계율에 어긋난 생각을 할래야 할 수 없는,
그런 이들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자신의 욕망과 세속심, 게으름을 합리화하는 수행자에게는,
멀고도 먼 꿈 속의 이야기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