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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이야기/지혜

어떤 분을 선지식으로 삼아야 하나요? 제 2편 반야의 지혜


저번 글에서 선지식의 기준이 되는 제일 조건이 계율이라고 설명하였다. 반드시 계율의 바탕 위에 반야의 지혜를 체득하기에, 내가 의지하는 선지식이 계율이 갖추어져 있다면 그 다음으로 살펴보야야 할 것은, 바로 불교의 핵심인 '반야의 지혜' '공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추고 있는가이다.
공성에 대한 지혜를 체득한 분이나, 비록 체득하지는 못했더라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분은, 우리를 불법의 핵심으로 바로 이끌 수 있다. 내가 의지하는 선지식이 항상 반야의 공성에 의거하되 진제와 속제 양변을 여의지 않고 적절히 법을 설하고 계시는지 우리는 잘 살펴보아야 한다.

말세에는 우리를 미혹하게 하는 외도의 가르침이 참으로 많다. 특히, 계율을 지키면서도 우리에게 올바른 가르침을 전해주지 못하는 스승들도 있으니 올바른 법을 만나기는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면 외도의 스승들이 가르치는 몇가지 유형을 파악해 보자.

첫째, 늘 눈에 보이지 않는 신통한 세계를 이야기 하는 스승들을 경계해야 한다. 예를 들어, 불보살님들의 수기를 받았다거나, 남의 마음을 읽는다거나, 선정속에서 다른 세계에 다녀온다거나, 어떤 계시를 받았다는 등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내가 의지하는 선지식이 이렇게 신통방통한 이야기를 한다면 한번 곰곰히 생각을 해보자.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 반야의 지혜이고, 과거 일곱부처님의 공통된 가르침이 '모든 악을 짓지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고, 스스로의 뜻을 맑히는 것'이라고 했는데, 나는 왜 이러한 신통에 마음이 쏠리는가? 어떠한 수승한 신통이라도 번뇌가 다하는 누진통과 그로 인한 자비의 마음보다 못하다고 했는데, 나는 왜 이러한 신통들에 관심이 가는가?
불법을 수행하는 목적은 이러한 신통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우리의 본성을 깨쳐 수많은 중생을 불도에 들게하는데 있다. 내가 신통을 갖춘 스승에게 의지하는 이유는 남보다 뛰어나고 싶은 마음, 남들을 지배하고자 하는 마음때문이다.(그 이면에는 항상 해결되지 않은 음욕심이 도사리고 있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갖추어진 것이 바로 우리의 불성인데, 그 불성은 찾지 않고 어째서 신통에 미혹해 있는가?  

둘째, 몸에 의지하여 수행하는 스승들을 경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차크라를 연다든지, 기맥을 뚫는다든지, 기를 정화한다든지, 백회가 열린다든지, 보이지 않는 법당을 만든다는 등의 이야기 또한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수행이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마음의 삼독심을 다스리지 못한 채, 몸에 의지한 수행만을 하기 때문이다. 계를 지키지 않고 보리심을 발하지 못한 수행자가 기맥 수행을 한다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하는 것과 같아서 해탈에 이르지 못한다.

누가 뭐라 해도 출가 수행의 목적은,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고 살펴 지혜와 자비를 발현시키는 것 이상은 없다.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즉 우리의 몸과 마음이 공한 것을 알아 모든 고통을 면한다는 가르침을 매일 듣고 외우는데도, 이 몸과 마음이 모두 공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스승에게 의지하여 삿된수행을 한다면, 죽을 때 가지고 가지도 못하는 몸뚱이의 기맥이 열린들, 스스로의 마음에서 계속 일어나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셋째, 위의 두 경우와는 조금 다르지만, '없다'는데에 빠져있는 스승들을 경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업이 없다든지, 선악이 없다든지, 과보가 없다든지 해서, 막행막식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반야의 공성을 제대로 깨친 것이 아니다. 반야의 공성을 제대로 깨친 사람은 자비의 행과 보살의 원력으로 중생구제의 삶을 살 수 밖에 없게 되어 있다. 업이나 선악이나 과보는 본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만, 연기법으로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나와 남을 이익되게 하고 영원한 행복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한 길과 올바른 길이 존재한다. 한 쪽면에만 치우쳐 불법을 이해하는 사람은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맨발로 돌아다니시면서 각기 근기에 맞는 설법을 하신 이유를 아직도 모르고 있는 사람이라 하겠다. 불법의 대의가 상구보리 하화중생인데, 공한 데에 빠져서 스스로 갈길을 모르는 사람은 만인의 스승이 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삿되지는 않더라도 우리가 반드시 경계해야 하는 스승들이 있으니 바로, 난행고행을 하는 스승들이다. 몇십년 장좌불와를 하거나, 몇만배 절을 하거나, 손가락을 태우거나 하는 이야기는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도 6년 고행을 포기하시고, 중도에 입각한 수행을 하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난행고행을 하는 스승들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 역시 바로 남들보다 뛰어나고자 하는 에고의 장난때문이다. 물론 공부에 대한 간절한 마음은 높이 살 수 있지만, 우리는 난행고행을 하는 스승들이 아상이 높은가에 대해 철저히 점검해야 한다. 유명한 스님 회상에서 삼천배를 하는 신도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오히려 훨씬 아상이 높고 굳어진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많이 본다. 자비로운 스승들은 자신이 어렵게 터득한 것일지언정, 누구나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보편적인 길을 보여준다. 몸을 학대하는 난행고행보다 더욱 간절하고 절실한 난행고행은 바로 반야의 지혜로 우리의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의지하고자 하는 선지식은 계율로 장엄되어 있으면서도, 항상 반야의 지혜를 갖춘 스승이어야만, 우리는 올바른 수행과 바른 지견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