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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이야기/지혜

어떤 분을 선지식으로 삼아야 하나요? 제 1편 계율


어떤 선지식을 만나야 하는가? 는 자신이 공부를 해나가는데 있어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보통 사람들은 신통능력이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많이 집착하기 때문에,
생사 해탈과 대자유로 이끌 수 있는 선지식을 찾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율장에는 대승적인 스승의 조건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계율에 의지하여 자기 마음을 충분히 조복시킨 자,
선정으로 산란한 마음들을 다스리고 승화시킨 자,
지혜로서 아상을 없앤 자'

이 조건은 다시 말하면,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인 계/정/혜 삼학을 실천하는 사람을 그 스승으로 삼아야 됨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말법시대에 어떤 분이 깨달은 분인지 쉽게 판단하기 어렵고, 자신이 스승을 가려낼 수 있는 안목이 부족할 때는, 계율은 그 됨됨이를 판단하는 아주 중요한 기준이 된다. 왜냐하면, 계율이란 깨달은 사람의 마음, 즉 존재계에서 가장 자비롭고 지혜로운 마음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막행막식을 보여주는 선지식들에 대하여 '역행보살'이라든지, '무애행'이라는 이름으로 아주 높게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계율을 잘 지키는 스승을 오히려 갑갑하게 여기고, 마음대로 행하는 스승을 '뭔가 가지고 있는 분'으로 받들기도 한다. 물론 깨달은 분들의 방편은 미묘하여 헤아리기 어렵고, 깨달은 분들은 고기나 술을 먹어도 그것이 자비로 발현되는 방편의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가 한 걸을 더 나아가 고민해야 할 것은, 막행막식이라는 방편은, 계율에 집착한 수행자에게 그 집착하는 마음을 파하기 위해서 보여줄 수 는 있을지언정, 계율을 휴지조각처럼 여기는 수행자나 갓 출가한 수행자에게는 보여주어서는 안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근대의 선지식으로 불리는 경허스님께서 당신은 무애행을 하시면서도, '중노릇하는 법' 이라는 글에서 '파 마늘과 고기를 먹지말라'고 하신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경허스님이 그런 무애행을 하면서, 결국은 세속에서 스님의 모습이 아닌, 속인의 모습으로 생을 마감하셨듯이, 무애행이라는 것은 삼보로 공경되는 승가안에서는 허용되는 모습이 아니다. 무애행을 하려면 승복을 벗고, 머리를 기르고, 저자거리로 나가서 중생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면서 그들을 제도해야 한다. 승복을 입고 거리낌없이 행동하는 사람은 무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목숨같이 지켜야 할 계율을 어기는 파계승일 뿐임을 명심해야 한다.

티벳의 달라이라마 스님께서 70이 넘은 나이에 채식을 선언하신 이유도, 자신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을지라도, 지혜와 자비심을 키워가야 하는 초심자에게는 채식이 아주 중요한 방편이 되기 때문에 진정한 동사섭을 보이신 것이다.
서산대사께서 남기신 말씀이 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선지식의 크고 넓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 볼 수 있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이리저리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기에...

깨달은 분에게 계율이란, 구속이 아닌 진정한 자유일 것이다. 그리고 그 분들이 계율로서 장엄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수많은 사람에게 올바른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여주시기 위한 거룩한 자비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계 바라밀은 우리가 어떤 사람을 선지식으로 삼아야하는가에 대하여 고민할 때, 제 일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