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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이야기/선정

선정 속의 체험

              <그림: 세세생생 원력수생, 스님 바느질하시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여기 지리산에 있으면, 많은 수행자들이 스님께 찾아온다. 그렇게 찾아온 사람들 중에 무언가를 얻어가는 사람들은, 늘 순수하고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체험들을 점검하러 온 사람들은 무언가를 얻어가기 이전에 오히려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했다. 신통한 체험에 빠져있던 사람들은 자신이 특별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오히려 일반사람들보다도 더 오만하고, 이해심도 부족하고, 마음이 열려 있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정봉 무무 스님께서는 늘 말씀하셨다.
"도를 깨쳤다는 사람이 무언가를 물어보고, 자신을 알리려 하는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도를 깨치면 모든 존재가 이미 깨달음의 상태에 있다는 점에서, 너무나 평등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직 전도된 생각때문에 고통받는 존재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자신의 성품을 보면, 보살 원력의 삶을 사는 것은 가장 자연스러우며 당연한 것이다. 도를 깨쳤다고 해서 돌아다니면서 막행막식하는 사람들은 아직 자신의 성품을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끔 자신에게 별다른 체험이 없다고 한탄하는 수행자들이 있다. 남들은 선정속에서 뭔가를 보고, 듣고, 또 알게 된다고 하던데... 왜 나는 그런 체험이 없는것일까. 그러나 스님께서는 언제나 모든 체험은 업보에 의해 형성되며, 가장 수승한 체험은 바로 체험없음의 체험이라고 늘 강조하셨다.

어떤 수행자들은 기이한 체험과 혹은 화두가 얼마나 잘 들리는지를 가지고 수행을 점검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자신의 수행을 점검할 수 있는 기준은 아주 기본적인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것이다. 내가 탐진치 삼독과 오욕락의 마음에서 자비와 지혜의 마음으로 전환하고 있는지... 내 눈앞에 불보살이 나타나고, 내가 과거생을 훤히 알게되고, 꿈속에서 화두가 들리고, 남의 생각을 귀신같이 알아맞춘들, 자신의 마음이 탐욕과 어리석음과 화냄과 교만으로 얼룩져 있다면, 그런 신통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스스로가 공부하는 수행자라고 말하면서, 기본적인 계에 철저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수행이라는 이름으로 속이는 것이다.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은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계로 출발하여 보현의 행원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깨친 사람과 아직 깨치지 못한 사람의 삶은 과연 다른 것일까?  깨친 사람은 중생을 향한 연민의 마음으로  보살도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러면 못 깨친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당연히 각자의 위치에서 중생을 향한 연민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참된 수행은 우리가 이미 자유롭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미 모든 존재는 자유롭기에 스스로의 에고에 빠져 깨달음을 논하지 말고... 다만,  깨달음의 삶, 보살원력의 삶을 사는 것이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비록 모든 법의 자성이 허공과 같음을 관찰하나,
부지런히 공덕을 닦아서 마음을 윤택하게 하고 깨끗이 하여
공덕장엄을 이루게 한다."
(문수사리소설 부사의 불경계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