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리산에서

법보신문~지리산 맥전마을 스님들 이야기


물욕 비우고 푸른 대자연에 깃들다
 
[지령1000호 특집]지리산 맥전마을 스님들 이야기
기사등록일 [2009년 06월 02일 13:31 화요일]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든 탐욕의 시대. 세상의 욕심에서 한걸음 물러나 맑은 눈길로 뭇 생명을 존중하며 부처님을 닮아가려는 이들 스님에게선 그 어느 향수보다 짙고 그윽한 계향, 정향, 해탈향이 묻어난다.
사진제공=불광출판사 하지권 작가

지리산 중턱에 자리 잡은 하동 운수리 맥전마을. 이곳 사람들에게 정봉 스님은 처음부터 별나게 비춰졌다. 지난 94년 어느날 홀연히 나타나 뒷산 가파른 동굴에서 꼬박 3년을 지내더니 대여섯 가구가 전부인 이곳 마을에 터를 잡았다.

기와지붕 번듯한 대웅전 대신 뚝딱뚝딱 널빤지로 손수 지은 인법당(因法堂). 허름한 한두 평 남짓의 작은 판잣집 법당에서 어찌 오뉴월 뙤약볕과 동지섣달 매서운 황소바람을 견딜까 싶었다. 하지만 스님은 끄떡도 않았다. 새벽 2시 40분이면 어김없이 스님의 도량석 맑은 목탁소리가 어둠에 잠든 지리산을 흔들어 깨웠다. 또 낮이면 마당에서 몇날며칠이고 크고 작은 돌덩어리와 씨름하면서 하나씩 치워나갔다.

안타까운 마을 사람들은 포클레인을 불러 한꺼번에 치우라고 권했다. 허나 스님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 땀방울을 뚝뚝 흘려가며 묵묵히 돌덩이를 옮겼다. 몇몇 사람들은 ‘저 스님은 매일 돌하고 논다’고 수군거렸지만 마을 사람들이 스님의 진심을 안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기계로 땅을 파고 뒤적이면 수많은 생명체가 죽을 것은 불을 보듯 훤한 일. 바위에 붙어 있는 개미 등 곤충들이 다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스님은 자신의 고단함을 기꺼이 감수했던 것이었다. 때론 바위에 붙어 있는 개미를 후후~ 불었고, 때론 개미들이 이사할 때까지 기다렸다. 또 때론 개미들에게 먹이를 주어가며 그렇게 손수 돌덩이를 옮겼던 것이다.


왼쪽부터 정봉 스님과 현현 스님 그리고 천진 스님.

지금도 스님의 방은 개미들에겐 안식처다. 여닫이 문틀이 바로 그곳. 언젠가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개미들을 본 스님이 문틀에 먹이를 놓아주었고 그것이 스님과 개미들의 ‘공존의 시작’이었다. 개미가 방안에 돌아다니면 밟힐 염려가 있기에 일부러 구석에다 먹이를 준 것이다. 특히 개미들의 먹이가 부족한 장마 때면 그들이 제일 좋아하는 잘게 자른 손톱부터 딱딱한 콩까지 슬며시 놓곤 했다. 그러면 개미들은 좋아라하며 밤새도록 먹을거리를 그들 집으로 옮긴다. 개미들에겐 이곳이 극락과 다름없는 것이다.

“집안의 파리, 모기, 개미와 함께 살지 못하고 살충제를 뿌려 죽인다면 내 안의 자비심은 자꾸 시들게 됩니다. 또 생명을 죽게 한 과보로 다음 생엔 병약한 몸을 받게 되는 것도 당연하지요. 아무리 작은 생명체라도 우리와 똑같이 고통 받거나 죽기를 싫어하고 행복하길 원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 어떤 동물이나 곤충도 인간과 동일한 생명의 무게를 지녔음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스님들 판잣집 토굴서 생활

스님은 늦깎이 출가자다. 경남 함양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스님은 어릴 때부터 유별났다. 하늘을 보며 우주의 끝을 궁리하거나 죽음에 대한 깊은 사색에 빠져들기도 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고등학교 진학 대신 이발소로 향했다. 동네사람들은 잘 나가는 집안의 아들이 그런 곳에서 일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부산대 음대를 졸업한 현현(왼쪽) 스님과 고려대 문과대를 졸업한 천진(오른쪽) 스님. 이들 두 스님에게 서로는 세상에 둘도 없는 도반이다.
사진제공=불광출판사 하지권 작가

이발소에 시작된 ‘세상 배우기’는 양복점, 신발공장, 가방공장, 비옷공장, 장미농장, 보험회사, 버스운전, 택시운전, 트럭운전 등으로 이어지는 등 그는 온갖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또 세월이 흘러 군대도 갔다 오고 결혼을 해서 아이도 낳았다. 하지만 화두는 줄곧 그를 놓아주지 않았고, 그도 틈만 나면 가부좌를 틀었다.

이런 가운데 한 순간 그의 눈이 환해진 것은 80년대 중반이었다. 세속적으로 많이 배우지 않았을 뿐더러 스님이나 이름난 재가불자도 아니었다. 그저 시내버스를 운전하던 소박하고 평범한 한 가장이 맞닥뜨린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는 세간의 일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절로 향할 것을 결심했다. 아내도 기꺼이 남편의 뜻을 받아들였다.

이후 스님은 절에서 장작을 패고 물을 길어 나르고 공양을 준비하는 등 절일을 도맡아했다. 힘들기는커녕 이대로 평생 살아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절에만 묶어놓지 않았다. 행자 생활을 한참 하던 어느날 속가의 아내가 몸져누워 생사의 기로에 놓여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병원에서도 이미 살릴 수 없다며 집으로 돌려보냈다는 것. 스님은 ‘나와 제일 가까운 인연을 제도하지 않으면 누구를 제도 하겠나’란 원력으로 산을 내려왔다. 동시에 막내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가족을 돌보리라 다짐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그의 세속에서의 삶은 출가생활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새벽에는 절집에서 생활을 하고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는 시내버스 운전을 하며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졌다. 하지만 병든 옛 아내와 가족을 보살피면서도 그는 부처님 공부를 놓치지 않았다. 버스가 신호에 걸리거나 정체되는 틈에도 그는 경전을 읽고 진언을 외웠다.

또 회사식당 김치도 물에 씻어 먹을 정도로 고기는 물론 오신채까지도 철저히 금했다. 처음 이상하게 생각했던 회사직원들도 나중엔 “강도사”라고 부르며 신뢰했고, 식당 주인도 그를 위한 반찬을 따로 준비할 정도였다. 그 무렵 부산 해운정사 조실 진제 스님은 그들 가족 모두 절에 와 살 수 있도록 배려했고 그때부터 3년간 절일을 맡아하며 진제 스님 밑에서 부지런히 정진했다.

그렇게 다시 3년, 옛 아내의 병이 기적적으로 완쾌되고 딸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에 그는 태백산으로 떠나 그곳에서 작은 집을 지어놓고 3년간 참선 수행을 했다. 이후 태백산에서 이곳 지리산 맥전마을 뒤쪽 산기슭 동굴로 옮겨와 미숫가루로 연명하며 3년을 또다시 수행에 매진했다. 비가 오면 줄줄 새는 비를 맞아야 했고, 겨울이면 살을 에는 칼바람과 마주해야 했던 혹독한 정진의 나날들….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드는 모기와 벌레들에겐 기꺼이 온몸을 내주었다. 허나 그 깊은 산중에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벗이 있었으니 바로 쥐들이다. 첫 해엔 이들로부터 미숫가루를 지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숨겨도 보고, 비닐로 몇 겹씩 꽁꽁 감싸기도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러고는 결국 오래지 않아 스님은 쥐와 공존하는 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가을이 되면 산에 나는 열매를 모아다가 겨울이 되면 쥐에게 주는 것. 처음엔 자못 경계하던 쥐들도 나중에는 손바닥까지 올라와 열매를 달게 먹곤 했다.

3년 동굴 수행을 마친 스님은 남해 한 절에서 100일 기도를 할 때 조계종 원로의원 활안 스님의 권유로 다시 조계종에 들어왔다. 종단이나 문중, 법랍이 큰 의미는 없었지만 자신의 공부를 제대로 회향하기 위해서였다. 스님은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사미계를 다시 받았다. 그리곤 쌍계사 강원과정을 거쳐 비구계를 받은 뒤 이곳 운수리 맥전마을로 돌아온 것이다. ‘한 발자국도 떼지 않고 얻는 이것, 천만 발자국 떼어 구할 바 없는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서원을 가슴에 담은 채로….

새앙쥐와 고양이들도 ‘도반’

스님이 맥전마을에 자리 잡은 후 도량 홍서원도 조금씩 제모습을 갖춰갔다. 소박한 판잣집 법당이야 그대로였지만 마당 한 켠에 뿌렸던 보리수, 앵두나무, 모과나무 등이 싹이 나더니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났다. 또 늦봄이면 노란 금잔화가, 가을이면 코스모스 등 온갖 꽃이 도량을 형형색색으로 장엄했다.

그렇게 봄이 오고 여름이 갔다. 새앙쥐는 세면장에 마련해 준 먹거리를 찾아 매일 들렀고, 산중의 고양이들도 끼니때가 되면 홍서원을 꼬박꼬박 참배했다. 맑은 목탁소리도 매일 새벽 끊이질 않았고 해도 몇 차례나 바뀌었다.


이곳 스님들이 굶주린 쥐들을 위해 마련한 쥐밥그릇.

두 명의 젊은 비구니 스님들이 이곳 맥적마을에 정착한 것은 지난 2002년 봄이었다. 천진 스님과 현현 스님. 지난 2000년 수덕사 견성암으로 출가해 도반의 연을 맺은 이들 스님은 공부를 위해 간혹 이곳을 찾다가 이번엔 아예 터를 잡은 것이다.

현재 홍서원 공양주 소임을 맡고 있는 현현 스님. 그는 부산대 음대를 졸업하고 얼마 후 출가했다. 정봉 스님의 속가 딸이기도 한 현현 스님이 출가를 결심한 것은 오로지 아버지의 영향이다. 출가한 아버지와 위독한 어머니. 주검처럼 누워있는 어머니를 지켜보며 행여 돌아가신 게 아닐까 하는 마음에 코밑에 휴지를 대보고 그것이 움직이면 아직 살아 계시다는 안도감에 소리 없이 흐느꼈던 나날들. 출가했던 아버지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건 현현 스님이 절망의 밑바닥을 헤매고 있었던 그 무렵이었다.

하루 종일 고된 일을 하고 돌아와서도 식구들이 잠들면 그 머리맡에서 늘 참선을 하던 아버지. 그리고 이를 몰래 지켜보았던 열 살 남짓 된 어린 딸. 어머니의 의식이 돌아올 때마다 조곤조곤 들려주던 아버지의 법문은 오히려 감수성 풍부한 어린 딸의 마음속에 깊은 여운을 남겼다.

어려운 형편에도 무난히 대학에 입학했던 현현 스님. 졸업 후 피아노 교사 일이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문득 스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은 무엇이고 진정으로 남을 위하는 길은 무엇일까 하는 깊은 고민에 빠져들곤 했다. 그럴 때면 아버지의 한없이 자비롭고 넉넉한 미소가 수시로 떠올랐고 결국 얼마 뒤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출가의 큰 발걸음을 성큼성큼 내딛었던 것이다.

누나 따라 동생도 출가

고려대 문과대를 졸업하고 출가한 천진 스님은 세속에선 ‘까탈스러운’ 딸이었다. 부모님의 남아선호에 사사건건 반기를 들던 그는 대학 입학 후엔 사회의 여러 차별과 권위, 부당함에 가슴앓이를 했다. 끊임없이 나누고 평가하는 이분법적 세상…. 대학졸업 후 늘 하고 싶었던 미술을 뒤늦게 시작해 다시 미대 입학을 앞둔 그해 겨울, 한 지인의 권유로 우연히 해남 대흥사를 찾게 됐다.

마침 성도재일을 맞아 특별정진 중이던 그 절에서는 재가자들에게 참선을 지도했다. 그리고 이날의 짧은 참선 경험은 그로 하여금 그동안 전혀 경험할 수 없었던 행복과 자유를 맛보게 했다. 이후 스님은 꾸준히 시민선방을 찾았다. 그러면서 지금까지의 이분법적 사고가 자신의 분별심에서 비롯됐음을 알았다. 스님은 대자유인이 되기 위해 집을 깨끗이 정리한 후 집을 나섰다. 훗날 이런 딸을 보고 천진 스님의 어머니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남들은 명문대 갔다고 좋은 딸 뒀다고 해도, 얼마나 유별난지 제가 맘 고생한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예. 그런데 이렇게 자기 마음에 꼭 드는 선지식을 모시고 좋은 도반과 함께 수행하니 그릇이 딱 제자리에 들어앉은 것처럼 제 마음이 너무 좋습니다.”

이렇듯 딸의 출가를 선뜻 받아들였던 천진 스님의 어머니도 막내아들마저 출가를 선언했을 땐 크게 상심했다. 출가한 누나를 찾아 휴가 중 견성암을 찾아왔던 막내 동생. 불교와 출가자의 삶에 궁금해 하던 동생에게 천진 스님은 도반 현현 스님과 의논해 정봉 스님과 인연을 맺도록 해주었다. 이후 동생은 정봉 스님과 장문의 편지를 주고받았고, 군복무를 끝낸 후 그도 ‘능엄’이라는 법명과 함께 새로운 출가자의 길을 시작했다.

한번은 천진 스님이 큰 절에서 행자생활을 하고 있던 동생 능엄 스님을 찾았을 때였다. 누나 천진 스님이 지리산에서 춥게 지내고 있음을 잘 알고 있던 능엄 스님은 미안한 마음에 그동안 자기 방의 보일러를 잠그고 지냈음을 알았다. 겨울철 밤늦게까지 법당에서 기도하느라 얼어 쩍쩍 갈라진 거친 손. 천진 스님은 피고름이 맺힌 능엄 스님의 손을 보며 자신도 더 열심히 정진하겠노라고 거듭 다짐하곤 했다.

천진 스님의 출가는 동생뿐 아니라 속가의 다른 가족들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결혼해서도 불법의 가르침을 놓지 않으려 애쓰는 속가의 동생 부부. 출가한 형제들을 따라 고기는 물론 오신채도 안 먹고 채식을 하는 그 동생에게 누군가 그 이유를 물었을 때 “누나와 동생이 모두 출가해 수행하는데 내가 도움이 되지는 못할지언정 방해가 돼서야 되겠습니까?

저는 그런 이유로 채식을 합니다.”라고 말했다던 동생. 또 매일 아침 108염주를 돌리며 “두 분 스님 열심히 불법 공부해 큰스님 되길 지성으로 기도한다”는 어머니의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천진 스님은 가슴 속 깊이 초발심을 되새기도 또 새겼다.

저녁마다 한 자리서 포살

천진 스님과 현현 스님이 상주하면서 달랑 인법당 하나뿐이던 홍서원에도 큰 변화가 일었다. 정봉 스님은 하동 쌍계사 창고에 있던 헌 나무들과 문짝들을 얻어다 직접 판잣집 ‘토굴’ 두 채를 지었다. 담벽은 콘크리트 블록에 플라스틱 병과 각종 폐품을 활용했다. 한 사람이 발 뻗고 누울 수 있을 정도의 작고 허름한 방. 그러나 이들 스님에겐 더 없이 아늑하고 소중한 공간이었다.

새벽 2시 40분, 도량석과 함께 시작되는 하루는 예불과 기도, 108 대참회기도, 아침공양, 아침법문, 자율정진, 108 대참회기도, 점심공양, 자율정진, 108 대참회기도, 휴식, 저녁공양, 저녁법문, 자율정진 등 일과로 반복됐다. 또 참회·감사·원력·회향의 마음을 일일이 글로 쓰는 저녁 포살 시간은 홍서원의 빼놓을 수 없는 일과 중 하나다. 그런 만큼 천진 스님과 현현 스님은 물론 얼마 전 법당 위편에 새로운 토굴을 마련하고 정진을 시작한 스님들과 해제 때 이곳에서 정진하는 스님들도 포살시간에는 반드시 동참해야 한다.

더불어 이곳 대중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홍서원의 불문율들이 또 있다. 모기, 파리, 개미 한 마리라도 죽이지 말 것, 낮에 자지 말 것, 새벽예불에 모든 수행을 다해 마칠 것, 시계 없이 새벽 2시 30분에 일어날 것, 부처님의 바른 법과 중생들을 향한 대원력의 마음 외에 다른 세속적인 마음은 내지말 것 등이었다. 결코 녹록치 않은 이들 불문율들도 7년이라는 시간 동안 몸에 익어 이젠 그렇게 살지 않는 게 더 어렵다는 것이 천진, 현현 스님의 말이다.

애벌레들을 위해 따로 마련한 홍서원 내 배추밭(오른쪽)

이곳에선 매일 인정사정없이 달려드는 모기들을 애써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인연으로 성불하라”며 기쁜 마음으로 보시하고, 개미들에겐 잘게 부순 콩이나 과자를 건넨다. 또 쥐 밥그릇과 고양이 밥그릇을 마련하고, 배추밭에 벌레들이 발견되면 한쪽 구석에 마련한 벌레용 채소밭으로 조심스레 옮겨준다. 마당 곳곳에 온갖 꽃을 가득 심은 것도 나비들과 꿀벌, 호박벌, 벌새들에게 맛있는 꿀을 보시하려는 의도에서였다.

한 번은 천진 스님의 이불 속에 손바닥보다 큰 지네가 찾아든 적이 있었다. 깜짝 놀라 일어나 앉은 스님은 순간 갈등에 빠졌다. ‘내가 꼭 저 지네를 잡아 내보내야 하나? 지네에게 이곳이 내 방이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다 내 업보 따라 인연 따라 물리는 것인데 그냥 받아들이자.’ 결국 스님은 지네는 지네대로 자신은 자신대로 살기로 결심하고 내친 김에 지네가 좋아한다는 포도까지 접시에 올려놨다. 또 지네가 따뜻한 이불 속에 들어왔다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자신으로 인해 놀라지 않도록 똑바로 누운 채 잠을 청했다. 용맹정진이 따로 없었다.

그건 다른 스님들도 마찬가지였다. 몇 해 전 벌들이 정봉 스님 창문에 집을 지은 적이 있었다. 그해 겨울, 스님은 끝내 벌집을 떼어내지 못했다. 덕분에 스님은 덧창문 닫는 것을 포기한 채 지리산의 춥고 긴 겨울을 그대로 나야했다. 이렇듯 대중 스님들은 동물과 곤충 한 마리도 배려하려 애썼고, 그 동물과 곤충들은 스님들에게 생명의 존귀함과 자비의 마음이 싹트도록 도왔다.

독버섯이 둘도 없는 양약이 된 사연

그렇게 서로 절차탁마하며 정진하는 맥적마을 생활. 그런 만큼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도 끊이질 않았다. 특히 지난 2006년 5월 이들 세 스님에겐 벌어진 일은 자비심이 목숨보다 더 위대함을 뼈저리게 느낀 일대 사건이었다. 그날 도량청소 중 천진 스님이 향긋한 송이향이 나는 버섯을 발견하고 이를 볶아 저녁공양으로 함께 먹었다. 그러나 잠시 후 현현 스님이 구토를 시작했고 이어 천진 스님과 정봉 스님도 구토와 함께 호흡 곤란 거기에 몸까지 굳어갔다. 독버섯이었던 것이다. 정봉 스님은 마침 동네에 있던 차를 운전해 읍내병원으로 향했다. 감각이 없어지고 목까지 뻣뻣해지고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읍내병원에서도 독버섯에는 해독약이 없다며 독이 몸에 퍼지면 제일 먼저 간에 손상이 가고 눈이 점점 안 보일 거라고 했다. 또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고 했다. 의사는 군내 의료원으로 당장 이동하자며 스님들을 구급차로 옮겨 타도록 했다. 그러나 얼마 후 군내 병원에 도착했지만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땅히 해독제도 없었고 다른 대책 또한 없어보였다. 이들 스님은 차라리 토굴에서 죽자며 만류하는 의료진을 뿌리치고 택시를 타고 읍내 병원으로 돌아왔다. 정봉 스님은 그곳에서 다시 초인적인 의지로 직접 차를 운전해 맥전마을로 돌아왔다. ‘이것이 죽음이구나.’ 몸은 생살을 잡아 뜯는 듯 고통스러웠지만 마음은 풍선처럼 한없이 가볍고 편안했다.

“지금이 공부하기 제일 좋은 때다. 철저히 깨어 지켜봐라.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겪는다. 오늘밤은 자서는 안 된다. 큰 믿음을 갖고 이 법당 방에서 참회기도 정진을 하자.” 정봉 스님의 말에 따라 이들 스님은 스러져가는 의식을 추슬러 기도하고 평상시처럼 도량석에 예불까지 드렸다. 이때 천진 스님과 현현 스님의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어떠한 상황이라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저희가 살아나면 부처님 일만 하다가 가겠습니다.”

그렇게 처절한 참회의 긴 밤을 지나 새벽이 동터올 무렵, 마침내 이들 스님은 죽음이 자신들을 비켜갔음을 알았다. 특히 아침에는 위 토굴 스님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지친 몸을 불일폭포 산행까지 다녀왔다. 독버섯으로 인한 죽음과의 직면,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금강석처럼 견고해진 신심. 그 버섯은 이들 스님에겐 독초가 아니라 산삼보다도 귀한 약초였던 것이다.

헌 나무들과 문짝들, 그리고 플라스틱병 등을 이용해 만든 스님들의 거주공간.

일반인·수행자 발길도 이어져

맥전골에 스님들이 터를 내린 지 10여 년. 이들 스님들의 생활이 알려지면서 한 명 두 명 이곳을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특히 천진 스님이 한때 이곳 수행생활과 얘기들을 인터넷 블로그에 올리면서 국내는 물론 미국이나 대만 등 외국에서 찾아오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불광출판사가 6월초 출간예정인 『지리산 스님들의 못 말리는 수행이야기』도 천진 스님과 현진 스님이 이곳 블로그에 올렸던 글들이다.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던 지난 여름 어느 한 불자가 토굴 아래쪽에 3층짜리 현대식 수행관을 지어 홍서원에 보시했다. 이들 스님이야 여전히 판잣집 토굴을 고집하고 있지만 덕분에 이곳을 찾는 일반인들은 편히 머무를 수 있게 된 점은 홍서원의 놀랄만한 변화 중 하나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든 탐욕의 시대. 세상의 욕심에서 한걸음 물러나 맑은 눈길로 뭇 생명을 존중하며 부처님을 닮아가려는 이들 스님에게선 그 어느 향수보다 짙고 그윽한 계향, 정향, 해탈향이 묻어난다. 또 “선지식들은 깨달은 사람을 기특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들이 존재계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바로 보리심을 일으켜 보살행을 하는 이들이다.”란 옛말을 절로 떠올리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지리산=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홍서원 스님들, 왜 채식 강조하나

“가장 훌륭한 방생은 바로 채식”
기사등록일 [2009년 06월 02일 13:41 화요일]

지리산 홍서원 스님들이 늘 강조하는 것이 바로 채식이다. 고기를 먹지 않는 그 행위 자체가 가장 훌륭한 방생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이들 스님은 우리가 마음을 잘 다스리고 늘 선하고 다른 존재를 이익 되게 하는 쪽으로 마음을 쓴다면 간소한 채식으로도 얼마든지 위대한 원력의 삶을 살 수 있다고 강조한다.

광우병, 조류독감 등 현대 질병들은 우리가 단지 표면적으로 이해하는 과보일 뿐, 내 입에 쏙쏙 들어맞는 온갖 맛나고 편리한 현대 생활 이면에 우리의 탐욕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받는 존재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게 이들 스님의 설명이다.

매년 온갖 육류 제품을 사고팔고 먹는 사람들에 의해 수백 억 동물들이 생명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세상. 또 채식 동물에게 동물 사료를 먹이고 잔인하게 도살하는 일들이 지구 곳곳에서 버젓이 일어나는데 어찌 과보가 없겠냐고 지적한다. 부들부들 떨며 죽어나온 살점 속에, 그 기막힌 분노와 공포가 맺혀있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광우병보다 무서운 것은 바로 그칠 줄 모르는 인간의 탐욕이라는 설명이다.

그런 까닭에 각 개인의 탐욕에서 모든 고통이 시작됐음을 인정하는 일, 그것이 우리가 행복해 지기 위해 해야 할 첫 걸음이라고 이들 스님은 강조한다. 특히 ‘산 목숨 죽이지 않는다’라는 불교의 첫째 계율을 목숨처럼 여기고 다른 생명을 배려하며 존중하는 삶, 이것이 사바세계를 정토로 만들어가는 길이라는 게 이들 스님의 신념이다.


1000호 [2009년 06월 02일 13:41]